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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어떤 절명시(絶命詩) /이명원

살아남은 자들의 책임 환기시키는 盧 전 대통령의 가슴아픈 유서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9-05-25 20:45:51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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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눈으로 지켜보던 텔레비전의 자막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보던 날의 충격은 너무도 큰 것이어서, 지금도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느끼기 어렵다. 그가 고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도를 통해 거듭 지켜보았으면서도 한 생애가 그렇게 종결될 수 있다는 사실의 고통은 너무나 생생하다.

죽기 직전 고인이 남긴 한 편의 유서를 읽으면서, 나는 그것이 자꾸만 절명시(絶命詩)처럼 느껴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는 구절에서 '고통'이란 말은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앞의 고통은 타인을 향한 것이며, 뒤의 고통은 스스로를 향한 것일 게다. 그는 죽음을 결심하는 최후의 시간에조차 스스로에게만 갇히지 않고, 그 자신이 초래한 타인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동시에 고인이 반복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그 '고통'은 자연인의 것이자 지난 민주화의 도정에 뜨겁게 동참했던 공인으로서의 열망이 시대적 한계 속에서 절망의 어조로 파열되어 나타난 고백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고통을 뒤늦게나마 발견하게 된 우리들이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또 다른 고통은 고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개인적 고통에 대한 처연한 공감이기도 하고, 고인과 함께 살아왔던 우리 시대가 민주화 이전의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데서 나타나는 더 커다란 시대적인 '고통'의 증대하는 압력에 대한 집단적 공명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모든 절명시들은 죽음을 결심한 한 자연인의 내면적 번민을 비밀스럽게 표현하면서, 죽음이라는 극단의 결단에 깃들어 있는 상황적·정치적 맥락을 그것을 읽는 자들이 적극적으로 의미화하게 만든다. 가령 일제의 조선강병을 비관하여 자결한 매천 황현의 '절명시'를 읽게 될 때의 느낌도 다르지 않다. '금수가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찌푸렸으니/ 무궁화의 세계는 이미 침몰하였네/ 추등(秋燈)에 책 덮고 천고의 역사를 생각하니/ 인간세의 선비 되기 어려워라'. 침몰하고 있는 '무궁화 세계'는 조선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과 동시에 한 선비의 내면의 붕괴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 꽉 막힌 현실 속에서 윤리적 자아가 느끼는 것은 거대한 고통과 부끄러움이다. 매천이 '인간세의 선비 되기 어려워라'하고 간명하게 고백하고 있는 그 상황은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통스런 상황과 정서상으로 긴밀하게 조응하고 있다.

이들이 직면해 있는 고통은 시대적인 압력이 개인의 실존적 고통과 부딪쳐 만들어낸 내면적 파문일 것이다. 뒤이어 그것은 세계의 끝남을 자신의 실존적 삶의 종결로 간주하려는 의식의 지향성을 낳고 있다. 노 전 대통령에게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일반인들조차 노 전대통령에 대한 전례가 없는 검찰의 고약한 수사의 방식에서 '정치보복'을 읽어내는 것처럼, 고인 역시 그것을 강렬하게 의식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그것으로 고통의 성격이 한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고통'은 개인적 치욕의 성격을 뛰어넘는다. 그의 죽음은 한국의 민주화가 용인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시대적 고통의 확인에서 온 것일 터이다. 그는 이 정권 들어 극단적으로 분출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빈사상태를 극단적으로 체험했다. 그 자신에게조차 민주화의 열망은 극단적인 절망으로 체험되었거니와, 그것은 '고통'으로 가득찬 삶이 아닐 수 없었다.
고인의 말처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들의 머리를 짓누르는 역사는 결코 '운명'을 긍정할 수가 없다. 고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삶이 가능한 것이었다면, 애초에 죽음을 앞당겨 스스로의 삶을 종결시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인의 절명시는 살아있는 자들에게 어떤 책임을 극적으로 상기시킨다. 우리는 고인의 삶과 죽음에서 증대하고 있는 현실적 '고통'에 대한 산 자들의 새로운 극복과 실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엄숙하게 깨닫는다. 이는 고인의 유서는 물론 단말마의 어조로 쓰여지고 있는 이 시대의 숱한 절명시들과 그 처절한 '고통'의 언어들이야말로 살아있는 우리 모두의 역사에 대한 책임을 필사적으로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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