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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매화꽃 그늘 아래서 /정찬주

매화꽃 향기로 달인 차 한잔 시와 함께하니 봄의 아취 사무쳐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9-03-20 21:42:22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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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내 산방(山房)을 나서 안개등을 켜고 저속으로 달린다. 안개가 짙어 20여 m 전방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런 안개 속에서 화엄사까지 가자니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그러나 소설가 김승옥이 단편소설 '무진기행'에서 '무진의 특산물은 안개'라고 말한 구절이 떠올라 안개 속의 풍경이 다소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난생 처음 참석하려고 가는 차회(茶會)다. 장소는 하동읍 먹점골 매화나무숲 산자락이니 화엄사에서도 섬진강을 따라 30분쯤 내려가야 한다. 차를 달이고 차회를 주관하는 다각(茶角)은 석정원 원장 선혜(禪慧) 스님이다. 차회는 야외에서 갖는 형식이므로 차인들끼리는 들차회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다행히 화엄사에 도착하여 대요(大了) 스님과 동행하고 나니 안개가 걷힌다. 섬진강이 안개로 머리를 감은 듯 더없이 조신하게 보인다. 결코 내 산방과 먼 거리가 아닌데도 매화꽃이 만발한 섬진강 강변을 오랜만에 구경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은둔자 유형의 멋없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아무리 풍광이 수려한 명승지라도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은 일부러 피했고, 내 산방 뜰에 자라고 있는 매화나무 세 그루만으로 큰 복을 받은 듯 자족해 왔던 것이다. 대요 스님이 잠시 차창을 열자 단숨에 매화꽃 향기가 차안 구석구석 가득 찬다. 강변의 매화나무들이 낯선 손님에게 선사한 향기다.

차회를 갖기로 한 먹점골 난야(蘭若)에는 이미 지인들이 도착해 있다. 대요 스님과 나는 차회 장소를 바로 찾지 못하고 매화나무숲 속을 헤매다가 겨우 난야로 들어선다. 매화꽃 그늘이 진 마당가 반석에는 벌써 다구들이 준비돼 있고, 소반에는 매화나무 한 가지씩 놓여 있다. 반석 위에 선혜 스님을 중심으로 시봉하는 명유 보살, 대요 스님, 선정화 보살, 능여 거사, 방산 거사, 원명심 보살, 무량광 보살 등이 앉아서 첫 번째 순서로 일완청다(一椀淸茶)를 기다린다. 선혜 스님이 대요 스님에게 "어느 잔으로 하시겠습니까" 하고 묻는다. 그러자 대요 스님이 "아무리 부어도 넘치지 않고 부족하지 않는 잔으로 하겠습니다"라고 답한다. 그러자 선혜 스님이 오른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차를 다완에 넣고 다선을 능숙하게 휘저으며 거품을 낸다. 그것을 격불(擊拂)이라 하는데, 공기가 좋으면 차 맛이 더 좋아진다고 한다. 그러니까 말차를 마신다는 것은 물과 차와 공기를 마시는 셈이다.

나는 조선 초기 막사발과 비슷한 천한봉 씨의 다완을 선택하였는데, 때마침 차회를 시샘하듯 강바람이 불고 까마귀가 날아와 운다. 뜻밖의 상황으로 차를 빨리 마셔버리자 선혜 스님이 한마디 한다. "너무 빨리 마시면 아취를 느끼지 못하고, 너무 늦게 마시면 맛과 향이 달아납니다. 말차는 거품이 꺼지기 전인 1분 안에 마시는 게 좋습니다." 모두가 말차를 한 잔씩 마시고 난 뒤 매화꽃 향기에 취해 시회(詩會)를 갖는다. 선혜 스님이 먼저 시인답게 '먹점골 차회'라는 제목으로 시를 읊조린다. '봄바람 따라/ 산굽이 더듬어 찾아가니/ 난야엔 주인 없고/ 매화꽃이 손님을 반기네/ 매화꽃 향기로 달인 차 즐기다/ 내려온 길 뒤돌아보니/ 아득한 산마루 눈꽃이 피었네'.

나는 차례가 되어 스님의 시를 '군더더기가 없고 여백이 많은 동양화 같다'라고 촌평하면서 절창이라고 느껴지는 '매화꽃 향기로 달인 차 즐기다'를 음미하며 다음 사람에게 넘겼는데, 대요 스님이 받는다. '매화 향기 반짝반짝 배회하는/ 온 골짝 이대로 선불장이요/ 걸음걸음마다 무상을 노래하니/ 산중의 큰 웃음소리 누가 듣는가(梅香哲徘徊 萬溪谷選佛 步步無常歌 山中笑聞誰)'. 대요 스님의 시 '매화향기'는 게송인데 스님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매화꽃 그늘은 나의 대학시절을 떠올리게도 한다. 신입생 백일장에서 진달래꽃 그늘에 앉아 글을 쓰던 때나 수십 년이 흐른 뒤 매화꽃 그늘에 앉아 시회를 갖는 지금이나 분위기가 흡사하다. 전생의 인연 같았던 차회를 마치고 내 산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한 후배에게 "매화꽃 향기를 너무 맡아 병이 날 것 같다"고 전화하고 말았는데, 온 골짜기에 매화꽃이 만발한 몽유(夢遊)의 산자락보다는 내 산방의 조촐한 뜰이 내 성정과 분수에 맞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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