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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오라, 강물 같은 세월이여 /정찬주

송년모임이 삶의 결의를 뜨겁게 다지는 자리 된다면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8-12-26 21:29:13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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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법정 스님께서 내게 법명을 주신 다음 해에 숙제라며 보내준 친필이 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라는 불경의 구절인데, 나는 지금도 책상 옆에 그 글을 좌우명 삼아 두고 있다.

좋은 글은 차가운 새벽별빛처럼 정신이 번쩍 들게 하고 그 여운이 길다. 맛있는 음식도 오래도록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음악 역시 다르지 않음을 며칠 전에 깨닫고는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좋은 음악과 얘기를 들었으니 잘 살아야지' 하고 스스로 약속했다. 송년모임에 초대받아 갔는데, 악기를 연주하는 세 분이 있어 작은 음악회라고 해도 좋았다. 악기는 하모니카와 기타 및 해금 등이었고, 내 큰딸처럼 눈빛이 또록또록한 아가씨가 조신하게 앉아 해금을 연주하는 동안 내 눈에서는 비늘이 떨어지는 듯했다.

장소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관한 한국미용박물관으로 처음에는 다소 생경했다. 모임을 준비하고 주선한, 전통김치만을 생산하는 고향식품의 대표이자 서각가인 심상범 씨의 상상력이 나를 압도했다. 엘리베이터가 4층에서 멈추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현실공간으로 회귀했다. 구면인 이순 박물관 관장이 조용하게 미소 지으며 안내했다. 먼저 와 담소하는 사람들과 클래식 기타리스트인 서만재 교수가 명상하는 자세로 기타 줄을 조율하는 소리에 나는 비로소 '이 자리가 각자의 목소리로 자기 얘기를 한마디씩 하는 송년회 자리구나' 하고 깨달았다.

내가 앉은 맞은편 벽에는 심상범 씨의 서각작품인 이백의 시 '산중문답(山中問答)'이 걸려 있어 문득 허리를 곧추세우게 했다. 남도산중으로 낙향한 어느 순간부터인가 '산중문답'은 나의 애창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니/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서 교수는 스페인 왕실 음악원에서 공부한 분답게 집시의 정열적인 곡들을, 전남대 의대 명예교수인 정선식 박사는 모둠발로 겅중대며 하모니카와 아코디언을 연주했다. 나는 음악에 취했다가도 모인 분들이 한마디씩 하는 말에 들뜬 감정을 식혔다. 각자 하는 일은 다르지만 멋과 인생이 회통했다.

수십 년 동안 남의 집을 지어온 광명건설 대표인 김영호 선생은 건축을 '진선미를 추구하는 종합예술이다'라고 한마디로 축약했으며, 다도(茶道)의 대가인 선혜 스님은 보성의 정흥사(正興寺) 절터에다 불교문학과 차문화를 접목하는 시적(詩的)인 도량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런가 하면 한국미용박물관 이순 관장과 이반 시인은 미용을 '몸의 꽃, 마음의 꽃'이라고 정의하면서 자신의 직업이 지향하는 궁극을 예술과 역사에다 두었다.

기타와 하모니카를 매혹적으로 연주한 두 분 교수의 한마디도 잊을 수 없다. 서 교수는 '기타는 소리가 작아서 오케스트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악기이지만 희로애락 속에 사는 우리 인생의 진정한 동반자'라고 했으며, 정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비브리오 패혈증의 원인균을 발견하고 그 백신을 개발한 노학자답게 말했다. "나는 처음에 사람에게 해로운 균들을 박멸할 각오로 유학도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해로운 균을 달래가며 그 균의 독성을 부드럽게 하는 쪽으로, 즉 그 균과 공생하는 방향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내 가슴을 촉촉하게 적신 정 박사의 태도는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분의 연구방향이 의학의 울타리를 넘어서 종교나 자연의 섭리 쪽으로 옮겨진 까닭이다. 정복이나 박멸 같은 인간중심의 오만에서 자비와 사랑을 백신으로 여기는 영혼의 세계 쪽으로 넘어와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자신의 키가 작아 키 큰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딸은 자신을 닮았다고 좌중을 웃겼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께 '땅에서부터 재면 누구보다 작아도, 하늘로부터 재면 누구보다 크다'는 나폴레옹의 명언을 헌사하고 싶다.

모임의 장소에서 내 차례가 되어 한 말이지만 자칫 허허롭고 우울한 분위기로 흐를 수도 있는 송년모임이 마음에 화상(火傷)을 입을 만큼 삶의 결의를 뜨겁게 다지는 자리가 된다면 어떨까 싶다. 세월이 지나간다고 생각하면 아쉽고 쓸쓸하겠지만 세월이 온다고 생각하면 무언가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은 의욕이 솟구치고 그래서 가슴 설레게 될 터이니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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