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시작된 미국발 금융위기는 어김없이 한국을 덮쳤고, 문약한 출판동네에까지 그 파고가 높다. 안타깝게도 그 첫 희생자로 부산의 면학도서와 청하서림이 부도를 맞았다. 이는 곧 이어 닥칠 더 큰 파고의 전주곡에 불과하다. 동시다발로 서점, 도매상, 출판사, 인쇄소 등 출판 프로세스의 라인들에서 꺼림칙한 소문들이 꼬리를 문다.
인터넷 서점의 공격적 경영과 대형 서점의 전국 체인화로 이미 지방 서점과 도매상의 위기는 진행돼 왔다. 영세한 출판사는 '잦은 감기'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고, 연초부터 인력 감축과 출간 종수의 감소 등 수세적 대응은 이번 파고를 넘기에 불안하다. 중·대형 출판사 부도설이 회자되고 있다. 아주 근거가 없진 않다. 3년 전 유행처럼 파주 출판단지로 따라 옮겨갔던 인쇄소들은 3년 거치 2년 상환이라는 외제 인쇄기를 너도나도 빌려 썼다. 3년 만기가 도래했다. 하필 지금.
출판 위기가 여론화되면 18번처럼 부르는 레퍼토리가 있다. 일본과 한국의 독서실태 비교. 일본은 한 달 동안 책을 한 권 이상 읽은 성인이 50%가 넘는데, 우리는 한 권도 읽지 않은 성인이 50% 이상이라는 둥. 일본은 공공도서관에서 우수 신간을 3000부 이상 구입해주는데, 우리는 출판사에 기증해달라고 손을 내민다는 둥. 출판 진흥 5개년, 10개년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둥. 맞는 말씀이지만, 자고 나면 검은 그림자가 실체를 드러내는 현실 앞에 무력하다.
무너진 하늘에서 구멍을 찾는 심정으로 학습 효과에 기대본다. 지나서 돌아보니 참 재미있는 현상이 눈에 띈다. 불황이 닥치면 과연 어떤 책들이 잘 팔릴까. 재테크 서적. 물론 평상시보다는 좀 더 나간다. 당시에도 많은 기획자들이 재테크 서적과 창업 가이드북 등 돈 벌고 아끼는 실용서들을 뒤적였으나 빗나갔던 기억이 있다. 당시 터진 베스트셀러는 다소 엉뚱한 서적들이었다. '무소유'나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등이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랐다. '익숙한 것과의 이별'은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시대어가 되었고, '아버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였다.
지금 베스트셀러 리스트에는 근래 드물게 문학류들이 대거 진입해 있다. 한 권 한 권 따져보면 다들 이유가 있어 10년 전과 비교하기 어렵고, 그들 간의 공통점도 찾기 쉽지 않을 수 있다. '흐르는 강물처럼'은 '연금술사'로 이미 국내 많은 독자군을 확보한 코엘류의 힘이다. '바람의 화원'은 드라마를 탔고, '아내가 결혼했다'와 '눈 먼 자들의 도시'는 영화 개봉과 함께 뛰어올랐다. '개밥바라기별'도 황석영 신작이다. 어쨌든 20위 안에 9종, 약 반이 문학류다. 주식이 반 토막 났고, 부동산이 얼어붙고, 환율이 급등해도 독자들은 소설책을 읽는다. 정작 시대를 반영한 책은 '부동산 대폭락 시대가 온다' 1종뿐이다. '시골의사의 주식투자란 무엇인가'는 시골의사 박경철의 10만 대기 독자들이 달려들었으니 시기물이 아니다.
불황과 문학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독자들은 삶이 팍팍해졌을 때 돈 버는 기술에 앞서 먼저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받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책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세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아닐까. 1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법정 스님으로부터 '무소유' 설법을 들으며 길 잃은 마음을 내려놓았듯, 참된 삶의 구도자인 코엘류와 함께 일상의 잔잔함 속에서 기적 같은 삶의 의미를 찾고 싶은 것이다. 과거에서, 좀 엉뚱한 가정에서, 잊었던 유년의 세계에서 적어도 일상처럼 안달복달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현재 9주째 베스트셀러 1위를 지키고 있는 영어책 '잉글리쉬 리스타트'. 조금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영어책이라고 해서 실용서이고, 재테크 서적과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악착같이 살아남기 위한 도구로 볼 것만은 아니다. 다른 영어책과 달리 마음잡고 공부하는 책이 아니다. 그냥 쓰윽 30분 정도 눈으로 읽어가기만 하면 된다. 사전도 필요 없다. 중학교 영어 단어 이상이 나오지 않으니까. 기억할지 모르나 10년 전 불황의 끝에 터진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가 역시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것도 그렇다. 두 책의 공통점은 영어 공부책이지만 독자를 괴롭히지 않고 자신감을 준다. 10년 전 '아버지'가 지금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듯하다. 같은 불황이라도 현실은 다르게 전개되고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웅진씽크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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