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인데도 이른 아침부터 날이 우중충하면 기분이 상쾌하지 못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슬리퍼를 신은 채 내 산방 이름이기도 한 이불재(耳佛齋)라고 쓰인 이정표까지 나갔다가 돌아온다. 산길 가에 핀 여러 꽃들이 우울한 기분을 씻어주기 때문이다. 묵정밭에는 노란 달맞이꽃들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고, 배롱나무들도 붉은 꽃무더기를 이루고 있다.
어머니와 내가 일군 참깨 밭의 흰 참깨 꽃도 볼 만하고, 법정스님께서 씨앗을 주어 심은 해바라기들도 '나도 감상하라'는 듯 일제히 꼿꼿하게 서서 농성하고 있다. 특히 사립문 옆 돌담에 핀 능소화는 아내를 기쁘게 한 꽃이다. 재작년에 뜬바위마을 중대장 댁에서 서너 뼘 크기의 어린 능소화나무를 얻어와 심은 것인데 올해 처음으로 꽃등(燈)을 밝히고 있다.
붓다는 늘 미소 짓는 분이다. 어느 절을 가보아도 미소 짓지 않은 부처님은 없다. 일본 어느 절에선가 '우는 미륵'을 보고 흥미를 느끼긴 했지만 그것은 예외이다. 무정물인 꽃도 미소 짓고 있으니 붓다이다. 피서의 공간인 개울가 그늘의 반석도 나를 미소 짓게 하니 붓다이다. 허물투성이인 우리도 미소 짓는 순간에는 붓다가 된다.
내가 불교에 깊이 귀의하게 된 까닭도 부처님의 미소를 보고 느낀 바 컸기 때문이다. 70년대 초 학번인 나는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반독재를 외치는 데모가 날마다 남산 교정을 휩쓸었고, 강의실의 휴강 기간도 그만큼 잦았던 것이다. 휴강기간이 길어지거나 방학이 되면 나는 수건 한 장, 칫솔 한 개가 든 가방을 메고 화순 쌍봉사를 찾았다. 그 무렵의 쌍봉사는 퇴락한 암자 규모로 식구라고는 주지스님 한 분, 공양주보살 한 분이 전부였다. 주지스님이 출타하고, 공양주보살이 무슨 일인가로 마을로 가버리면 나 혼자 절에 남아 있기도 했다.
꽃이 지는 날은 절이 너무 쓸쓸하여 소설습작은커녕 내 마음을 주체하기도 힘들었던 것 같다. 그래도 밥값은 해야 할 성싶어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거나, 마른 걸레를 들고 법당으로 들어가 청소하다보면 문득 산란한 마음이 가라앉아 있곤 했다. 하루는 불단 위로 올라가 부처님의 손바닥과 어깨에 쌓인 먼지를 닦아드릴 때였다. 무심코 허리를 펴고 부처님을 올려다보는 순간이었다. 부처님이 미소 짓고 있었다. 부처님의 미소를 보는 순간 눈에서 헛것이 어지럽게 떨어져나가는 듯했다. 전율이 등을 타고 흘렀다.
'아, 저 미소 짓는 경지가 바로 부처의 경지구나!' 나만의 깨달음이라면 깨달음이었다. 그동안에는 건성으로 법당을 들락거렸는데 어떤 오의가 홀연히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미소는 가슴을 열게 한다. 서로 소통하게 하여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게 한다. 그러나 화는 가슴을 닫게 한다. 시비의 벽을 쌓게 하여 불신과 증오를 더욱 배가시킨다. 요즘 권력을 탐하는 종교인들이, 이념을 달리하는 단체의 인사들이 보여주는 비본질적인 행태를 봐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미소 짓는 순간이 극락이요, 화내는 순간이 지옥이라고 설했을 것이다. 일타스님이 번역하여 소개한 문수보살의 게송도 진정한 인간의 길을 다시금 생각게 해준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아내는 산방 천정에 사는 박쥐가 어디론가 나가버렸다고 좋아한다. 검은 쌀처럼 생긴 박쥐똥이 방구석에 없는 것을 보니 아내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박쥐식구들이 아주 먼 숲속으로 이사를 간 것 같아 허전하다. 아내는 밤중이 되면 이 방 저 방을 날아다니는 박쥐가 무서워 그런 마음이 들었겠지만 나는 박쥐의 고마움을 알기 때문에 박쥐에게 미안하기조차 하다. 박쥐 덕분에 파리나 모기를 쫓기 위해 가정용 살충제를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지금까지 단잠을 이뤘던 것이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인간이 자고 있는 동안 해충들을 먹이로 잡아먹고 있으니 인간과 박쥐 모두 공존하는, 아니 서로 돕고 사는 게 참 좋지 아니한가. 이 사소한 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생태계 사슬의 일부분일 뿐이다.
사실, 박쥐가 무섭다는 것은 선입관 내지는 사람 중심의 관점일 뿐이다. 생명 중심의 세상에서는 박쥐도 사람과 같이 살려고 하는 소중한 생명이니 박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박쥐와 정이 들어 함께 살 만했는데,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아 아쉽다.
'숫타니파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나는 오늘 그 구절을 이렇게 바꿔본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다 미소 짓게 하라.'
소설가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