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 10일까지 카린 갤러리

‘신화’라고 하면 많은 경우 제우스, 헤라가 등장하는 그리스·로마신화를 떠올린다. 바다 건너까지 가지 않는다면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단군신화 같은, 우리나라 역사에 얽힌 신화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이처럼 통상적인 신화는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고 눈으로 보지도 못한, 그래서 ‘그냥 믿는 것’인 경우가 많다.

잭슨심 작가의 ‘알파벳 카드 덤보’. 카린갤러리 제공

프랑스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은 이와는 결이 다르다.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주인공이며, 그가 말하는 신화란 과거나 역사가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결정된 가치관이나 담론을 의미한다.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신화는 표면적으로는 의도가 드러나지 않는 이중성을 갖고 있어서 이를 드러내는 게 학자의 소명이라고 했다. 기획 전시 ‘오늘의 신화’전은 이 같은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신화라 여기는 현대 사회의 담론의 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이중성을 고민하게 한다는 점에서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5명의 작가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되어온’ 상징물의 이면을 드러내기 위해 그 상징물이 가진 상투적 의미를 깨부순다.

남궁호 작가는 17세기 유행했던 바니타스 정물화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했다. 바니타스 정물화는 인간의 유한함, 물질적 즐거움의 한계를 상징하는 오브제를 포함한 정물화다. 작가는 한계를 의미하는 오브제에 익살스러운 표정을 집어넣어 ‘죽는다는 건 존재의 소멸인가’와 같은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김수지 작가의 ‘Lucid Vision-Distant Dream Ⅰ’. 카린갤러리 제공

김수지 작가는 각기 다른 서사를 가진 그림을 겹겹이 쌓아 올리는 기법으로 삶과 죽음,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여러 번 겹쳐 올리고 이를 다시 긁어내 최근 것보다 이전 것을 더욱 드러냄으로써 과거가 현재보다 더 중요하거나 의미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현대사회의 신화,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이중성’이라는 다소 어려운 주제를 드러내는 도구로 다채로운 캐릭터가 소환된 점은 이번 전시의 중요한 특징을 이룬다.

이은 작가는 미디어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신화’는 움직임이라고 봤다. 쇼츠, 움짤 같은 짧은 동영상의 뿌리를 반복적인 움직임에서 찾은 작가는 일렁이는것 처럼 흐릿한 캔버스 속 캐릭터를 통해 움직임과 그 이중성을 표현해낸다.

잭슨심 작가는 좀 더 적극적으로 캐릭터를 차용했다. 도널드 덕, 핑크 팬더, 건담, 도라에몽은 작가 특유의 자유분방함을 입고 재탄생했다. 이렇게 캔버스에서 새 옷을 입은 캐릭터는 더 이상 친근하지도 그렇다고 매정하지도 않는 중립의 상태에 서서 지금까지 안주해왔던 동심의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정안용 작가의 작품은 ‘연기’다. 보이지는 않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관념’을 현대사회의 ‘신화’로 본 작가는 사라지거나 생겨나는 연기를 통해 존재의 실존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전시는 부산 해운대 카린 갤러리에서 3월 1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