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마 출신 ‘레클리스’ 이야기
- 한국전쟁 터지며 군마로 활약
- 포탄 터지는 고지서 탄약 운반
- 상사까지 승진…훈장만 10여 개
- 당시 전우들 증언으로 삶 조명

“우리 부대는 켄터키 더비 우승마와 레클리스를 대결시키는 도전을 제안했어. 단, 경주는 한국에서 개최하고, 켄터키 더비 우승마도 탄약을 등에 실어야 한다는 조건이야.” 여기서 ‘우리 부대’는 한국전쟁에 참전 중인 미 해병대이다, ‘레클리스’는 미 해병대의 전설이 된 군마 레클리스를 말한다.

한국전쟁 당시 레클리스와 우정을 나눴던 미 해병대원들. 대원들은 미국의 전설적인 경주마 ‘네이티브 댄서’에게 레클리스와 경주 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사진에 ‘논두렁 경마 대회(The Paddy Derby)’ 팻말이 보인다(버지니아주 콴티코 미 해병대 역사부 제공). 도레미엔터테인먼트 제공

레클리스의 혈통은 어미가 제주마, 아비는 서러브레드로 추정되는 혼혈 마로, 오늘날 ‘한라마’로 불리는 품종이다. 서울 신설동 경마장에서 태어난 레클리스의 본명은 ‘아침해’였다. 경주마로 조련받던 중 전쟁이 터졌고, 아침해는 부산의 부두에서 화물을 나르는 짐말이 됐다. 마침, 군마가 필요했던 미 해병대 피더슨 중위의 눈에 들어 250달러에 팔린다.

미국 버지니아주 콴티코 소재 국립해병대박물관 & 유산센터의 셈퍼 피델리스 공원에 세워진 레클리스 동상(마크 테널리 제공). 도레미엔터테인먼트 제공

미 해병대 제1사단 무반동총 소대에 배치된 레클리스는 전쟁 대비 군마 훈련을 받았다. 제주마의 강인함과 서러브레드의 날렵함을 고루 지닌 레클리스는 전장에서 뛰어난 체력과 끈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레클리스는 해병대원 사이에서 ‘말’이 아닌 ‘해병’으로 불렸다. 레클리스는 뛰어난 전공을 인정받아 미국 해병대 역사상 최초로 동물에게 수여한 하사 계급장을 받고, 미국에 귀화한 뒤 상사로 승진한다. 또한 미국 퍼플하트 훈장, 유엔 종군 훈장, 미 국방부 종군장 등 10개 이상 훈장을 받았다. ‘라이프’지가 선정한 미국 100대 영웅에도 포함됐다.

1953년 3월 한국전쟁 마지막 격전장인 네바다 전초 전투. 중공군은 판문점 북방의 네바다 구역, 즉 베가스 리노 카슨 고지를 집중 타격하며 최전선 돌파를 시도했다. 포탄 1만4000발이 쏟아지는 격렬한 전투 현장. 치열한 고지 점령전에서 레클리스는 거침없이 질주했다.

“단 하루 동안, 레클리스는 여러 사격 지점을 51번 왕복했고, 이중 95퍼센트는 혼자서 전투 구역을 통과했다. 총 386발의 탄약, 즉 5톤에 달하는 폭발물을 수십 번에 걸쳐 등에 싣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위험한 지형을 오르내렸다. 피더슨의 추정에 따르면, 이날 레클리스는 56㎞ 거리를 이동했고, 논밭과 가파른 산악 지형을 옮겨 다녔으며, 마지막 오르막 경사는 항상 45도 각도였다. 레클리스는 적의 포탄이 분당 500발씩 쏟아지는 ‘폭발 지옥’ 속에서도 무거운 탄약을 안전하게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와 같은 희생과 용기를 보여준 말은 과거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다. 레클리스는 미국 해병대의 이름에 진정으로 어울리는 말이었다.” 책에는 레클리스의 동료였던 미 해병대원들의 증언이 흘러넘친다.

한국전쟁 때 레클리스의 소속 부대였던 미 해병대 제1사단 무반동총 소대 지휘관 앤드루 기어 중령은 레클리스의 삶과 전투 경험을 정밀하게 기록한 ‘레클리스: 해병대의 자부심’이라는 감동적인 전기를 펴내 큰 호평을 받기도 했다.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영화 산업에 종사하는 작가 로빈 허턴은 앤드루 기어의 책을 참고하며 이 책 ‘레클리스’를 썼다. 이 책은 한국전쟁 참전 뒤 생존해 있는 미 해병들과 많은 지휘관, 그리고 그 가족을 폭넓게 인터뷰하고, 레클리스 관련 공식 문서와 자료를 8년간 추적 조사한 끝에 완성한 레클리스 전기이다. 한국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피어난 레클리스의 용기와 희생, 그리고 전우애의 고귀함을 정밀하게 복원한 기록이다.

레클리스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해병대 전우들이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펜들턴 기지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1968년 세상을 떠났다. 이후 레클리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와 동상이 미국 여러 곳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