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에는 ‘패’라고 하는 독특한 모양이 있다. 흑과 백이 서로 한 점씩 따내기를 계속할 수 있는 모양을 ‘패’라고 하는데, 한자로는 ‘겁(劫)’자를 쓴다. 쌍방이 따내기를 계속하면 영구히 지속된다는 의미.
패를 배짱으로 버틴다는 의미에서 ‘패(覇)’자를 쓰는 이도 있으나, 바둑평론가인 박영철 씨에 따르면 이것은 틀린 표기라고 한다. ‘패’는 순수한 우리말이라는 것이다. 패 중에는 단패, 쌍패, 한 수 늦은 패, 이단패, 꽃놀이패, 천지대패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이러한 패의 종류와 성격을 알아두는 것은 패싸움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한 수 늦은 패나 이단패라면 패를 이기려고 너무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두어야 한다.
패 중에서 기력이 낮은 아마추어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에 ‘만년패’가 있다. 패를 이기려면 만년이나 걸린다는 지독한 과장법을 쓴 말인데, 이 패의 성질을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림에서 좌상귀의 모양이 전형적인 만년패의 형태. 백이 귀의 한 점을 이으면 빅이 되어 흑이 살아버리기 때문에 이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패를 이기려고 들면 상당히 힘이 든다.
우상귀처럼 백1에서 3으로 세 수를 소비하고 나서 안 쪽으로 들어가 패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수를 들이는 것이 마치 만년이나 걸리는 것과 같다 해서 ‘만년패’라고 하는 것이다.
우상귀처럼 여러 수 소비해야 한다면 패를 걸어 이긴다고 해도 거의 이득이 없다. 패를 해소하기까지 무려 5수를 소비하게 되는데, 백의 이득이 따낸 돌 8점과 귀의 1집을 합하여 17집이니 한 수 평균 3집 남짓한 이익밖에 안 된다.
따라서 만년패가 나면 보류했다가 끝내기 단계에 가서 정리를 해 가며 패를 위협하는 것이 보통이다. 좌하귀처럼 백 뀸들을 끝내기 차원에서 둔 후 흑에게 패를 하겠다고 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만일 최종적으로 백이 패를 이길 수 없다면 결국 백A로 이어 빅으로 처리한다.
이 모양에서 흑이 우하귀처럼 흑뀴로 따내고 흑1에 몰면 무조건 살 수 있다. 백이 흑 한점을 따내면 뒤에서 몰아 완생. 이렇게 살면 만년패가 끝나 버리므로 백으로서는 패를 버텨 가급적 좌하귀와 같은 형태로 유도하는 것이 좋다.
만년패가 났을 때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좌하귀와 같은 모양에서 흑은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에 백이 패를 할 경우에 대비해 자기 집을 일부러 메워 팻감을 없애는 현상이다. 백쪽에서는 패를 걸지 않고도 상당한 이득을 보게 되는 일이 생긴다.
예전에 사카다 9단은 상당히 앞선 바둑을 이런 만년패 때문에 종반에 자꾸 자기 집을 메우다가 미세하게 패한 적이 있다. 만년패가 나왔을 때 팻감이 별로 없다면 울며 겨자먹기로 자기 집을 메워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단점이 있긴 하지만 만년패를 잘 활용하면 중반에 상당히 유리한 상황을 전개할 수 있다. 그냥 패보다는 만년패로 만들어 쉽사리 잡히지 않는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만년패를 잡으려고 덤벼들면 내버려둬도 공격자가 불리해진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 정수현 9단·명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