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중구 남포동 자갈치시장 인근 거제장못횟집에 '문희 엄마'의 오랜 고래고기 단골들이 모였다. 사진 오른쪽부터 이용규 김영신 김삼종 김홍근 씨.

"고래고기 사이소. 곰장어도 사이소." 30여년 전까지만 해도 부산 자갈치시장에만 가면 늘 들을 수 있었던 정겨운 소리다. 소프라노와 알토의 중간쯤 되는 '자갈치아지매'의 음역으로 말로 다 못할 숱한 사연을 담아 목청껏 뱉어내는 이 소리는 부산의 대표적인 소리 가운데 하나다. 그 속에는 부산의 근대 역사가 있고, 생활이 있으며, 부산 사람들 삶의 질곡과 애환이 고스란이 담겨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소리는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그야말로 '추억의 소리'가 됐다.

고래고기 또한 부산 사람과 외지인 가릴 것 없이 '부산'의 상징적 장소 중 하나인 자갈치시장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스치는 것 중의 하나다. 뇌리에 고래고기가 떠오름과 동시에 그 알 듯 모를 듯하면서도 다양하기 이를데 없는 특유의 '그 맛'을 떠 올리게 된다. 물론 고래고기를 말할 때 전국적인 고래 집산지인 울산 장생포항이나 경북 포항의 그것을 빼 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부산의 고래고기는 '자갈치시장'이라는 브랜드파워와 어우러져 그 명성을 상호 보완하고 뒷받침하는 '시너지효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에 부산의 맛이라고 한들 손색이 없다. 특히 많은 사람들은 좌판에 앉아서, 혹은 천막으로 둘러쳐진 2평 남짓한 포장마차형 가건물 안에서 먹던 고래고기의 맛을 잊지 못한다. 흔히 '12가지 맛'이라고 하는 그 다양하고 신비로운 맛에다 '자갈치아지매'들이 얹어 주던 구수한 인정의 맛까지 더해져 '13가지 맛'이 된 그 자갈치 고래고기 맛을.


■서민 음식에서 미식가들 별미로

자갈치시장의 고래고기는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서민의 음식이었다. 자갈치시장에서 영도다리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만날 수 있는 좌판에 고래고기들이 넘쳐났다. 아무 곳이나 슬쩍 걸터앉아 부담없이 소주 한 잔 곁들여 먹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상업 포경에 대한 제한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공급량이 모자라지 않았고 푸줏간에서 돼지고기 한 두 근 사듯이 뭉치로 살 수도 있었다.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못한 서민들일지라도 친구끼리, 가족끼리 자갈치시장 좌판에서 고래고기를 경제적으로 큰 부담없이 포만감 있게 먹을 수 있었던 시절이다.

하지만 그 같은 이야기는 이제 말 그대로 '옛날 이야기'가 됐다. 상업 포경 금지 조치(1986년) 이후 우연히 고깃배의 그물에 걸린 고래 위주로 유통이 되기 때문에 공급량이 급격히 줄어든 탓이다. 자연스럽게 가격도 뛰었다.

최근 부산 중구 남포동 자갈치시장 인근 거제장목횟집 내에서 오랫만에 선후배들과 만나 고래고기 수육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던 이용규(52) 씨는 "고래고기를 즐겨 먹기 시작한 지 30년도 더 됐는데 지금은 먹고 싶어도 자주 먹을 수 없는 귀한 음식이 됐다"며 빙긋 웃는다. 삶의 대부분을 자갈치시장 주변에서 선박 관련 업종에 종사한 이 씨와 친구들은 "'고래고기 한 점에 소주 한 잔'이라는 말이 생긴 것은 사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지. 비싸지고 난 후 생겼지. 그 전에는 말 그대로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어"라고 덧붙였다. 이들이 모인 장소는 거제장목횟집이지만 실은 이 점포 문 앞 귀퉁이에 의자 하나 탁자 하나 놓아두고 고래고기를 팔고 있는 '문희 엄마' 김명숙(54) 씨의 단골 손님들이다. 김 씨는 "30년 전까지만 해도 살코기로 양념 버무린 두루치기도 만들어 먹었고 국이나 탕을 끓여 밥상에 올리기도 했는데 지금은 대부분 수육으로 한정된다"며 "공급이 부족해 값이 올랐으니 그 같은 호사를 누릴 수 없다"고 말했다.


■'12가지 맛', 사실은 수백 가지 맛

고래고기의 맛은 너무도 다양하고 풍성해서 '12가지 맛'이라고 불린다. 수육 한 점 씹을 때마다 서로 다른 맛을 내고 씹으면 씹을수록 풍부한 미감을 느끼게 한다. 부위마다 다른 맛이고 고래 종류마다 맛이 다르다. 그러다 보니 사실 '12가지 맛'이라는 말은 정확히 12가지의 특정한 맛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수백 가지나 될 만큼 다양한 맛을 낸다는 뜻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가장 맛이 있다는 부위로 통하는 뱃살은 '우네'라고 하는데 살살 녹는 듯한 지방의 부드러움과 고소함이 일품이다. 껍데기가 흰색이다. 쫄깃한 씹는 맛이 일품인 지느러미(오베기), 지방과 껍데기(검정색)에 살코기가 살짝 붙어 있어 돼지 삼겹살을 연상케하는 등살(바가지살), 씹을수록 감칠맛이 나는 심줄 등도 우네에 비해서는 덜하지만 인기가 있다. 소창 대창 허파 혓바닥 콩팥 등도 있다. 부위별로 따로 주문해도 되지만 대부분의 손님들은 6~7가지 부위를 한 접시에 담은 모듬세트를 선호한다.

부위별로 다른 맛을 내는 데다 고래의 종류에 따라서도 맛이 제각각이다. 일반적으로 가장 맛있다고 정평이 난 밍크고래를 비롯해 참고래 향고래 흰수염고래 범고래 등의 맛이 모두 다르다. 자갈치아지매들은 이 5가지의 고래만 '진짜 고래'로 인정한다. 곱세기 상쾡이 곤노 등으로 불리는 돌고래 종류는 진정한 의미의 고래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같은 종류의 고래라도 맛이 천차만별이다. 그러니 실제 고래고기 맛은 수백 가지도 넘는다는 것이 맞는 말인 셈이다. 그래서 고래고기는 '먹는 방법도 수백 가지'라고 일컬어진다. 하지만 역시 이렇게 많은 맛과 먹는 방법을 가졌지만 고래고기의 맛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너무 풍부해서 오히려 넘치는 듯한 고소함'이라고 자갈치아지매들은 입을 모은다.


■땡초 곁들인 젓국, 볶은 깨소금 소스

자갈치 고래고기의 맛을 더욱 풍부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특유의 매콤함과 짭짤함을 지닌 젓국 소스다. 갈치순태젓갈, 멸치원액 맑은 것, 까나리 등을 적절히 배합하고 땡초를 잘게 썰어 넣은 소스와 곁들인 고래고기의 맛을 '지상 최고의 오묘한 맛'이라고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 또 맵고 짠 소스와는 별도로 볶은 소금에 볶은 참깨를 혼합한 마른 소스도 함께 상에 오른다. 기호에 따라서, 또는 기분에 따라 다른 소스에 찍어 먹으니 맛은 더욱 풍부하고 다양해지기 마련이다.

이처럼 고기 자체의 맛과 소스의 맛도 좋지만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자갈치 고래고기의 맛은 바로 '추억의 맛'이다. 편안한 좌판이나 천막형 길거리 가게에 앉아서 고래고기를 먹으며 '고래 고래' 소리지르며 토론하던 기억. 얼큰하게 취하면 송창식의 노래 '고래사냥'을 목이 터져라 '고래 고래' 불러대지 않았던가.



# '문희 엄마' 김명숙 씨의 꿈

- 추억의 좌판 천막서 먹던 고래고기의 '전통' 되찾았으면…

자갈치시장에 가면 고래고기는 있지만 추억의 좌판이나 천막은 이제 없다. 4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고래고기 좌판이었지만 최근 5년 동안의 실랑이 끝에 지난 3월 25일 모두 원래의 자리에서 자진 철거했다. '무허가 노점상'이라는 달갑잖은 '딱지'가 이들을 추억과 삶의 거리에서 비켜나게 한 것이다. 당시 자진해 좌판을 걷은 노점상의 수는 총 65명. 그 가운데는 뚱보할매 영란이네 문희엄마 이북하단 등 고래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꽤 유명했던 노점들도 포함돼 있다. 40대부터 8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65명 가운데 고래고기를 취급했던 사람들은 사실 13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곰장어구이 생선 젓갈 건어물 판매상 등 다양했지만 아무래도 고래고기 좌판이 없어졌다는 상징성이 크다.

이들 고래고기 노점상은 비록 좌판에서는 밀려났지만 자갈치시장 앞 거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27년 경력의 '문희 엄마' 김명숙(54·사진) 씨도 그 중 한 명이다. 40년 전부터 고래고기 좌판을 했던 친정 어머니 이갑순(77) 씨를 이어 좌판을 했다는 문 씨는 노점상 당시 자신의 자리였던 곳 맞은 편에 있는 거제장목횟집 출입문 옆에 조그마한 자리를 얻어 일을 계속하고 있다.

김 씨는 "노점상의 입장에서 보면 과연 자갈치시장의 현대화와 노점상 철거가 수십년 동안의 추억과 맞바꿀만큼 가치있는 일인지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며 "부산시와 중구청 부산시수협에서 구두로나마 '자갈치 매립지에 상가건물을 지으면 입주 또는 임대 분양권을 우선적으로 주겠다'는 약속을 꼭 지켜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 씨는 "1971년 이전에는 어머니가 광주리를 인채 단속을 피해 이리 저리 쫓겨다니며 고래고기를 팔았는데 당시 박영수 시장께서 부임한 후 한 줄로 앉아서 장사하라며 허락해 준 것"이라며 "비록 좌판이지만 그것도 자갈치 고래고기의 역사와 전통 아니냐"고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