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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복도로 리포트<3-15>산복도로에 살다:산동네 그리던 故 박병제 화가

달동네, 그 고단함마저 사랑한 화가

  • 배재한 기자 myway@kookje.co.kr
  •  |   입력 : 2010-05-03 20:30:31
  •  |   본지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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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복도로 골목길을 주로 그리는 한 젊은 화가에 대한 기사가 나간 지난 2월 어느 날, 취재기자의 휴대전화에 낯선 발신번호가 찍혔다. 주위의 소란스러운 분위기와 함께 한 사나이의 다소 상기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이 분을 빼놓고서 산복도로, 산동네 그림을 이야기 할 수 없다"면서 '이 분'을 꼭 기사화해줄 것을 강권(?)하다시피 했다. 낯선 목소리의 사나이가 강권한 '이 분'이 바로 서양화가 고 박병제이다.

취재기자는 고 박병제 화가의 삶과 작품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5월은 고 박병제 화가의 1주기(5월26일)를 맞는 달. 때마침 고인의 1주기를 맞아 동료 선·후배들이 추모전도 연다.


산동네 출신, 서민의 삶을 그리다

   
생전 박병제 화가.
박병제 화백은 1954년 부산 서구 초장동 산비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토성초등 덕원중 배정고 등 그가 다닌 학교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유년기와 학창시절의 꿈과 기억도 산동네와 함께 하고 있다.

그는 산복도로 가파른 골목길, 자갈치시장통의 시끄러움 등 일상의 공간과 삶에 천착한 '서민화가'였다. 그 자신이 산동네 출신이며, 어머니(78)는 얼마 전까지 부산공동어시장 상인(중도매인)으로 자갈치 충무동 어시장에서 생선을 만져 온 자갈치 아지매였다. 그렇기에 달동네와 자갈치시장 등을 배경으로 낮은 자들의 삶을 그린 것은 어쩌면 그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를 아는 지인들은 "중앙대 예술대 회화과를 졸업한 1980년대 초반부터 산동네의 삶을 그리기 시작해 평생 동안 천착했다"고 말했다.

   
고 박병제 화가의 대표작 '하늘을 보다'
그는 캔버스에 어떤 용액도 섞지 않은 유화물감을 붓으로 칠하고, 나이프로 그대로 두껍게 붙여나가는 방식으로 산복도로의 삶을 정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마치 농촌 토담집 흙벽돌의 기억을 되살리기라도 하는 듯 사람냄새가 흠뻑 배어 나온다. 그의 대표작 '하늘을 보다'는 빨래를 너는 아낙, 좁은 골목길에서 뛰노는 개구쟁이, 담벼락에 기대어 하늘 향해 고개를 든 남자의 모습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산동네의 일상적 공간이자, 익숙한 우리의 주변 풍경들이다. 달동네의 고불고불한 골목, 아이를 업은 아낙, 산복도로를 힘겹게 오르는 사람…. 다소 쓸쓸하지만 또한 따뜻하고 정답다.

고 박병제 화가의 30년 지기인 이광호 부산민주공원 관장은 "진정 산복도로를 사랑했으며, 산복도로 그림의 선구자가 바로 화가 박병제"라면서 "그로 인해 부산의 산동네는 사람이 머무르고 싶고, 살고 싶은 아름다운 공간으로 재창조됐다"고 평가했다.


1주기 맞아 추모전, 9월 회고전 개최

   
산동네 풍경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고 박병제 화가의 작품.
오는 26일 고 박병제 화가의 1주기를 맞아 그의 작가 정신을 기리는 추모전인 '아름다운 동행 展' 준비가 한창이다. 오는 26일부터 31일까지 부산 대연동 석류원에서 열리는 추모전에 동행 의사를 밝힌 작가가 이미 46명이나 된다. 참여 작가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추모전을 준비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귀띔했다.

이번 추모전은 고 박병제 화가의 작가정신을 기리고 작품 세계를 재조명하자는 것이 1차적 목표이지만 화집 발간과 회고전을 열기 위한 징검다리의 성격도 띠고 있다. 추모전과 함께 화집 발간, 회고전 준비를 위한 추진위원회(추진위원 김원백 이인철 방정아)가 구성됐다. 박병제 화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소장가들 중 연락이 닿은 분은 대부분 화집 발간과 회고전의 취지에 공감하고 흔쾌히 작품을 내놓겠다는 의사를 표시하고 있다. 이 또한 고 박병제 화가의 생전 후덕함과 곧은 삶의 자세와 무관하지 않다.


사무치는 그리움과 가난만 남은 빈자리

   
고 박병제 화가의 외동딸 유란 씨가 아버지가 그린 자화상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취재기자는 두 차례 부산 동래구 사직동 시영아파트 고 박병제 화가의 집을 찾았다. 13평짜리 낡은 시영아파트의 작은 방에는 아직도 그가 만년에 그림을 그리던 붓과 캔버스 나이프 등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가 잠 잘 때를 제외하곤 언제나 클래식이 흘러나왔던 카세트라디오, 밀짚모자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가 나타나 미완성인 작품의 마무리에 나설 듯한 분위기였다.

그의 삶은 산동네 골목풍경만큼이나 가팔랐다. 그는 평생을 전업 작가로 살았다. 고정 수입이 없었다. 한마디로 밥벌이도 되지 않는 화가의 삶을 살다 간 것이다. 13평 시영아파트마저 전세라는 사실은 그동안 그와 그의 가족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가를 말해 주었다. 남은 가족은 그의 치열한 예술혼에 대한 존경심과 사무치는 그리움, 현실을 짓누르는 가난에 울고 있었다.

부인 김미순(54) 씨는 "그림을 그릴 때는 불을 댕긴 담배가 다 타 들어가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고 고인을 회고했다. 김 씨는 "술 좋아하고 친구 좋아했던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면서 "육신은 이렇게 일찍 우리 곁을 떠났지만 혼을 쏟은 작품만이라도 오래 오래 마음속에 남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고인이 끔찍히 사랑했던 외동딸 유란(24) 씨는 "어릴 때 아빠에게 나를 그려 달라고 보챌 때면 아빠는 언제나 그림 속의 아이는 모두 유란이라고 말씀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 1주기 추모전 준비하는 이성희 시인

- "힘들게 사는 가족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고 박병제 화백의 치열한 예술혼을 기리자는 것과 함께 가장이 떠난 뒤 더없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족들에게 뭔가 작은 힘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1주기를 맞아 추모전을 준비하게 됐습니다."

고교시절인 1970년대 후반부터 30년 가까이 고 박병제 화가와 이런 저런 인연을 이어온 부산의 중견시인 이성희(사진) 씨는 20여 일 앞으로 다가온 1주기 추모전 준비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지난 달 30일 근무하고 있는 학교(금성고교)에서 기자와 만난 이 씨는 박병제 화가를 통해 "고흐의 예술혼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화가는 늘 캔버스를 보면서 싸운다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싸움이 파괴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창조를 위한 치열한 내면 투쟁이었던 것이죠."

밝고 화사한 풍경화나 꽃그림 등 이른바 잘 팔리는(?) 그림 대신 다소 칙칙해 보일지언정 고단한 서민의 삶이 묻어나는 산동네의 골목길, 거친 삶이 뒤엉키는 자갈치의 장터를 평생 고집한 것은 산동네 출신인 화가 자신이 누구보다 산동네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박 화가는 집에 월급을 갖다 준 적이 없습니다. 수입은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예술가는 사람이 낳지만 예술가의 아내는 하늘이 낳는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가족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화가는 그림에 열중할 수 있었지만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번 추모전은 가족을 돕자는 뜻도 담겨있습니다."

그는 "박병제 화가는 신화적 이야기가 배어 있는 우리 지역의 몇 안되는 예술가였다"면서 "이번 추모전이 산동네 화가 박병제를 영원히 기억하고 추억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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