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르쥬 로지크 1977년 설립, 메이저 영화제 권좌 20여년간 지속
- 로지크 집행위원장 장기집권 비판 '뉴 몬트리올영화제' 2005년 창설 리셉션
- 연방·주정부마저 예산지원 비협조…옛명예 회복 급선무
- 1983년 임권택 감독 '불의 딸' 첫 참가 후 한국영화와 끈끈한 역사 이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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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몬트리올영화제의 주극장인 메종뇌브극장 전경. |
토론토와 밴쿠버, 그리고 몬트리올영화제는 모두 캐나다를 대표하는 메이저영화제들이다. 올해 35주년을 맞는 토론토영화제는 피어스 핸들링과 노아 코언이 이끌고 있으며 비경쟁영화제 중 정상급에 속한다. 온타리오 호숫가에 있는 토론토는 인구 437만의 캐나다 제1의 도시이며, 영어사용권에 속한다. 내년에 30주년을 맞는 밴쿠버영화제도 비경쟁영화제이지만 최우수작품에 '용호(龍虎)상'을 시상하고 있어 비경쟁영화제이면서 '뉴커런츠상'을 수여하는 부산국제영화제와 성격이 비슷하다. 알란 프레니가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밴쿠버는 불어사용권이며, 최근 개최된 동계올림픽으로 우리 국민에게 친근해진 도시다.
토론토보다 1년 늦게 탄생한 몬트리올영화제는 한때 8대 영화제의 반열에 올랐던 경쟁영화제이다. 창설 이후 지금까지 세르쥬 로지크 위원장이 장기 집권하고 있다. 인구 320만의 몬트리올은 불어사용권인 퀘벡 주의 수도이며, 세인트 로렌스강가에 위치한 캐나다 제2의 도시다. 캐나다의 주요 영화제 중 최초로 방문했던 곳이 몬트리올영화제였다.
1988년 4월, 나는 8년간의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화진흥공사로 자리를 옮겼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전국에서 크고 작은 문화행사들이 기획되고 있었고, 영화진흥공사도 올림픽기간 중에 우리 영화 10편을 서울 대한극장에서 무료 상영하는 계획을 확정해 놓고 있었다. 이 계획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회의적이었다.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에 온 외국인이 극장을 찾을 것 같지 않았고, 이미 개봉했던 영화를 내국인이 볼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별도로 '해외우수영화특별전'을 마련했다. '88서울올림픽'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소련 동독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 등 공산권 국가들의 영화를 포함,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1985년 이후 주요 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 40여 편을 초청할 수 있었다. 작은 규모의 국제영화제를 연 셈이다. 이런 가운데 임권택 감독의 '아다다'가 몬트리올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올랐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인 세르쥬 로지크가 직접 서울에 와서 선정해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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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다다'로 1988년 몬트리올영화제에 초대받아 참가한 임권택(맨 오른쪽) 감독과 배우 신혜수, 필자가 함께 찍은 기념사진. |
이러한 분위기를 어떻게 더 좋은 결과로 이어갈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영화가 중요 영화제에서 경쟁부문에 선정되면 영화진흥공사에서 '한국의 밤'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고, 즉시 임권택 감독을 설득했다. 그리고 KBS 측에 양해를 구해 드라마 '지리산'을 찍고 있던 주연배우 신혜수와 함께 몬트리올로 날아갔다. 박수길 주 캐나다 한국대사에게 '한국의 밤' 행사에 참석한 후 영화제 집행위원장과 조찬을 함께 해달라고 부탁했고, 문화공보부에는 천호선 주 캐나다 공보관을 몬트리올에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나원찬 몬트리올 총영사는 공관에 대표단을 초대하여 환영 만찬을 열었고, 영사 1명과 승용차 1대를 배치해 주었다. 당시는 국제영화제의 네트워크는 물론이고, 아무런 토대나 관행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아다다'의 첫 시사는 1400석의 메종뇌브극장에서 열리는 오전 프로그램이었다. 우리 교민들이 많이 참석, 열띤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도록 몬트리올에 있는 모든 한국 교회 목사에게도 일일이 전화로 부탁하기도 했다. 나 역시 처음 참석한 영화제였기에 '아다다'에 대한 분위기 조성과 홍보에 치중했다. 다행히 '아다다'는 공식시사가 끝난 후 관객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고, 주연배우 신혜수는 여우주연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이때부터 국제영화제와의 만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다음해인 1989년 8월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 바라아제'가 모스크바영화제 경쟁부문에 선정되었을 때에도 대표단을 파견, '한국의 밤' 행사를 개최했다. 이 관행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파티를 통한 교류는 영화제의 또 다른 축제인 동시에 창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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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몬트리올영화제 집행위원장 세르쥬 로지크. |
몬트리올영화제는 33년 전인 1977년 세르쥬 로지크와 다니엘 소샤에 의해 설립되었다. 로지크는 회장 겸 집행위원장을, 다니엘은 사무총장을 현재까지 맡고 있다. 20년 째 마켓책임을 맡고 있는 질 베리오도 1978년부터 일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세 사람은 최장수 집행위원장, 또는 사무총장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만하다.
세르쥬 로지크는 1931년생으로 올해 79세가 된다. 대학졸업 후 영화예술학교를 창설한 후 그 책임자로 활동했고, 장 뤽 고다르 특별전과 같은 기획전을 꾸준히 열어오다 몬트리올영화제를 창설했다. 이처럼 20여 년간 메이저 경쟁영화제로의 권좌를 누렸던 몬트리올영화제는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내우외환을 겪게 된다. 2003년 5월 칸영화제 기간 중 몬트리올영화제 개최시기를 9월 초로 늦춘다고 발표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개최시기가 겹치게 된 베니스영화제의 당시 모리츠 데 하델른의 원색적인 비난과 함께 강력한 항의를 받게 되었고, 세계영화제작자연맹(FIAPF)은 경고와 함께 경쟁영화제의 등급을 A등급에서 B등급으로 하향조정했다. 몬트리올영화제의 로지크는 이에 불복하여 연맹의 결정을 거부함으로서 상당기간 갈등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영화제 최대의 시련과 위기는 안으로부터 왔다. 2003년 장기집권으로 영화제가 타성과 침체에 빠졌다는 비판여론이 일자, 연방정부와 주정부, 시당국은 영화제에 대한 지원금을 끊었고,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에서 물러난 모리츠 데 하델른에게 새로운 영화제의 창설을 위탁했다. 이에 하델른은 2005년 2월 13일 제55회 베를린영화제에서 '뉴 몬트리올영화제'의 창설을 알리는 리셉션을 개최했다. 로지크는 사면초가에 몰렸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하델른의 뉴 몬트리올영화제는 한번으로 사라졌다. 보다 많은 관객을 유치하고, 유명 배우와 감독을 보게 되리라고 기대했던 관객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로지크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었지만, 지금도 연방정부나 주 정부로부터 예산을 확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몬트리올영화제와 한국영화는 오랜 기간 끈끈한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1983년 임권택 감독의 '불의 딸'이 참가한 이후, 이두용의 '뽕'(1986), 박철수의 '안개기둥'(1987)에 이어 1988년 이두용의 '업'과 임권택의 '아다다'가 초대받았다. 1990년에는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과 신승수의 '수탉'이, 1991년에는 김유진의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박광수의 '그들도 우리처럼', 장길수의 '은마는 오지 않는다'가 상영되었고 '은마는 오지 않는다'는 여우주연상(이혜숙)과 각본상(장길수)을 수상했다. 1992년에는 박종원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최우수제작가상(도동환)을, 1996년에는 박철수의 '학생부군신위'가 최우수예술공헌상을 탔다. 1997년에는 이명세의 '지독한 사랑' 등 2편이, 1998년에는 '한국영화 특별전'으로 10편의 한국영화가 초청되어 교민사회를 열광케 했다. '아름다운 시절', '창', '나쁜 영화', '편지', '강원도의 힘',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내안에 부는 바람', '낮은 목소리2', '엑스트라' 등 다양한 한국영화가 극장을 수놓았다. 이후에도 진출은 계속 이어졌다. 1999년에는 '이재수의 난' 등 5편, 2000년에는 '박하사탕' 등 3편, 2001년에는 '친구' 등 3편, 2002년에는 '클래식' 등 4편, 2005년에는 '말아톤'과 '활', 2006년에는 '너는 내 운명', '데이지', '야수' 등 3편, 2007년에는 '여름이 가기 전에', '풀 메탈 빌리지'와 함께 강수연이 심사위원으로 초대되었다.
최근에는 비교적 한국영화의 몬트리올 진출이 주춤한 편이다. 이에 대해 세르쥬 로지크는 한국에서 몬트리올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지원을 해주지 않고 있다고 불만을 털어놓는다. 그와 나는 22년을 사귀어 온 오랜 친구다. 4년 전에 그는 토론토방송국에 근무하는 한국여성을 며느리로 삼았다. 몬트리올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한국에서 전통결혼식을 다시 올렸을 때 로지크 부부는 중국 출장 중이어서 참석을 못했고, 내가 대구에 가서 신랑 아버지 역할을 한 적도 있다.
1988년과 1990년에 이어 세 번째로 2008년 8월 몬트리올을 방문했을 때 영화제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주 극장인 메종뇌브에서는 하루 한 번만 저녁에 경쟁영화를 상영하였고, 세르쥬 로지크의 아들 프랑소와가 관장으로 있는 임페리얼 극장을 경쟁영화 전용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영화는 새로 조성된 멀티플렉스 극장 콰티에 라틴을 이용하고, 야외광장에서도 밤늦게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미국배우 알란 래드의 아들이자 제작자로 활약하고 있는 알란 래드 주니어 특별전과 함께 미국배우인 토니 커티스와 일본의 영화큐레이터였던 가시히코 가와기타 추모전이 열리고 있었다. 로지크는 영화제 기간 중 주요 게스트들을 버스로 세 시간 거리에 있는 그의 농장에 초청하여 가족적인 분위기의 파티를 준비하기도 했다.
어떤 영화제건 한두 번의 위기나 시련은 있게 마련이다. 몬트리올과 우리와의 오랜 우정을 생각할 때 몬트리올영화제가 세르쥬 로지크를 중심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옛 명성을 되찾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들이야말로 영화제 역사의 산증인들이 아니겠는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