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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문학기행 <91> 이윤학 시인과 홍성

시인의 글밭이 되어준 저 아득한 갯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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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군 남당항 앞에 펼쳐진 천수만 갯벌. 바다 건너 길다랗게 보이는 땅은 안면도다.

- 피 끓던 젊은 시절 떠나고만 싶었던 고향집 뒷 언덕에 오두막 손수 짓고 글을 쓰는 시인
- 널따랗게 펼쳐진 서해바다와 갯벌서 담금질된 감성이 벼리가 되었을 터

"아이고, 인제 진짜 더 안 갖다 주셔도 됩니다"라고 말을 하면서도 입에는 다시 군침이 괴고 있었다. 시인의 어머니는 '열치젓'(멸치가 아니다)을 넣어 치대고 있던 김장김치를 자꾸 내주었다. 갓 담근 빨간 김장김치와 '뭐 더 줄 것 어디 없나'하는 표정으로 그걸 권하는 인심은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그때 출타했던 시인의 아버지가 돌아왔다.

시인의 부친은 서른 명이나 되는 문학기행 일행이 들이닥친 상황을 잠깐 지켜보더니 말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내 나타난 부친의 손엔 떡이며 수육이 담긴 자루가 들려있었다. "왜들 벌써 가신다 그랴. 멀리서들 오셨는데. 이것 좀 잡숫구 가유." 다음 일정을 위해 시골집을 떠나려던 일행은 "어흠, 어흠" 하더니 하나 둘 다시 발길을 돌려 부친 쪽으로 향했다. 그새 부친은 어디선가 소주 막걸리까지 들고왔다.


■뜻밖에 펼쳐진 시골집 작은 잔치

이윤학 시인이 자신의 지은 오두막 작업실 앞에 앉았다.
충남 홍성군 서부면 양곡리 339. 이윤학(44) 시인의 고향집이고 부모님 이상진(70) 엄향섭(70) 씨 부부가 살고 있는 시골집이다. 시인과 함께 고향을 찾아가는 문학기행이 아니면 도대체 어떤 가을여행에서 시골 여염집에, 그것도 김장하는 날을 골라 찾아가서 김치와 막걸리를 얻어먹을 수 있을 거란 말인가. 그것도 서른 명이. 시간이 지체돼 안면도 꽃지해수욕장 낙조를 못볼까 슬슬 걱정이 되는 것 같던 다른 일행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냅둬유. 여긴 충청도 아뉴. 해도 좀 즘잖게 츤츤이 지겄쥬'.

'주먹을 불끈 쥐고/기침을 시작하는 아버지./금 캐러 광산에 다닌 아버지./돌가루 쌓아놓고 사는 아버지.//새벽 4시를 알리는/아버지의 기침 소리./뭉텅이별 쏟아지는/아버지의 기침 소리.//네가 갓난아기였을 때/너희 아버지는 금 캐러 가기 전에/금 캐러 갔다 와서/네 눈을 바라보곤 했다.//삼십 후반이 된 아들에게/아버지 얘기를 흘려놓고/어머니/비닐집 속으로 사라진다.//뿌옇게 물방울 열린 비닐집/갈빗대 튀어나온 비닐집//경운기 몰고 풀 깎으러 가는/넥타이 허리띠 졸라맨 아버지.'('기침' 전문. 이윤학 시집 '그림자를 마신다' 수록)

고향집으로 오기 직전, 우리는 근처 천수초등학교에 들러 이번 문학기행의 주인공 이윤학 시인의 문학강연을 들었다. 시인이 졸업한 이 초등학교는 2007년 소규모 학교 통폐합 과정에서 폐교됐고 내년에 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복지시설로 문을 열 예정이다. 아이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잡초만 무성히 자라고 있던 운동장에서 시인이 들려준 이야기를 생각해보니, '기침'이라는 시 속에 많은 내용이 압축돼 있었다.

교정 풍경을 새삼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그는 이야기했다. "이웃마을 판교리에는 금광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 폐광됐죠.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들 중 금광에서 일하던 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금광에서 일을 하면 돌가루를 많이 마시게 되니까 빨리 돌아가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아빠 없는 아이들이 많았죠." 시 속에서 시인의 아버지가 '뭉텅이별 쏟아지는 기침'을 '새벽 4시'에 하는 것도 금 캐러 다녔던 직업을 가졌던 전력 때문이다. "나는 직접 보았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문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아버지 모습을. 얼마나 막막했을까요. 새끼들은 줄줄이 있지…"


■떠나고 싶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시인은 "어렸을 적엔 무작정, 죽도로 떠나고만 싶었다"고 털어놨다. "이 동네에서 10㎞ 떨어진 곳에 토굴새우젓, 어리굴젓으로 유명한 광천이 있습니다. 거기로 장항선이 지나갑니다. 용산역에서 출발해 장항까지 가죠. 흐린 날이라야만 기차의 기적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가출하고 싶었죠. 어설프게 가출했다 배가 고파 돌아오기도 했고 고2때는 부모님 돈을 몰래 갖고 2주 동안 떠돈 적도 있죠." 이런 시가 눈에 띄였다. '나는 내가 아니었음 싶다./나는 내가 없는 곳으로가서/나랑 만나 살고 싶다//복숭아꽃 핀 언덕을 넘어가고 싶다./복숭아꽃 피는 언덕으로 가고 싶다.'('복숭아꽃 핀 언덕' 전문, 시집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 수록)

서울에 살고 있는 시인은 지금은 "2주에 한 번, 자주 올 땐 1주일에 한 번" 고향집에 온다. 문득, 그 '변화' 속에 한 시인의,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 우리 삶의 행로가 마치 갈 길 정해져 있는 철로처럼 놓여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가 끓는 시절엔 버리고 싶은 것이 고향, 긴 세월 동안 뭔가 이뤘든 못 이뤘든 생활의 비바람에 젖어 지쳤을 때 언제 그랬느냐는 듯 슬며시 돌아와도 받아주는 곳이 고향인 거다. 그러니 고향을 잃으면 쓸쓸하다.

홍성은 멀고 넓은 고장이었다. 경기도 턱밑까지 올라가야 했고, 문학기행 고참 참가자들이 '에이스'라며 엄지 손가락 치켜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 문학기행 전용 관광버스 기사의 솜씨로도 부산서 가는 데 4시간 반이 걸렸다. 그런데 거기에는 부산과는 다른 모습의 바다가 있었다. 그 바다가 반가워 마음이 들떴다. 이윤학 시인이 처음 안내해 준 곳은 대하축제와 젓갈이 유명한 남당항이었다. 남당항 앞바다는 천수만이고 건너 편에는 안면도와 간월도가 있다.

어릴 적 남당항과 꽃섬으로 소풍을 다녔다는 시인은 안면도 쪽을 가리키며 "저쪽에 섬이 하나 있고 교회가 있는데 신도는 할머니 한 분이다. 꽤 멀어보이지만 저 교회에서 종을 치면 여기까지 소리가 날아온다"고 했다.

'죽도에는 스물일곱 집이 있었다./죽도에는 학교와 교회가 있었다./학교는 오래전에 폐교되고/교회에는 전도사 한 분이/할머니 한 분을 앉혀놓고/성경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바닷바람이 육지 쪽으로 부는 일요일/죽도 교회 종소리가 바다를 건너왔다.'('죽도' 전문, 시집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 수록)


■2년 동안 지은 오두막 작업실

사실 이윤학 시인의 시 세계는 미묘하다. 그는 시에서 미래를 기약하지도 않고, 과거에 회한을 드러내지도 않으며, 특정한 서정에 매달리지도 않는 경향을 보인다. 그는 거의 대부분 시에서 응시하고 묘사할 뿐이다. 평론가들의 의견을 접해보고 또 그의 시를 읽어보면, 그가 마치 냉정한 검객처럼 시를 쓴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주장하지도 않고 감정의 과잉도 없다. 칼을 뽑아 슥 베고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칼집에 도로 꽂아버리는 격이다. 그런 태도를 드러내는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제발 아픈 척 하지 말자./이제 제발 죄진 척하지 말자./이제 제발 늙은 척 하지 말자.'('갈대' 전문, 시집 '그림자를 마신다' 수록)

남당항, 안면도와 간월도, 만해 한용운 생가를 돌며 여러 곳을 보았지만 뇌리에 꽂힌 풍경은 역시 남당항에서 본 서해의 갯벌이었다. 찰방찰방거리던 바다가 정해진 시간이 되면 일시에 사라지고 넓디넓은 갯벌로 변하는 이 극적인 변화의 반복은 이곳 사람들에게, 시인에게 어떤 심성을 선사했을까. 이번 문학기행에서 독자들 사이에 가장 인기가 높았던 장소는 이 시인의 고향집 뒷언덕에 그가 직접 2년 동안 '총 공사비' 150만 원을 들여 시나브로 지었다는 한 평 반 짜리 오두막 작업실이었다.

자주 고향에 내려오는 그는 농삿일을 돕거나 집안일을 거들고 나면 이 좁고 아늑한 그만의 아지트에서 글을 쓴다고 했다. 좁은 오두막에는 컴퓨터, 프린터, 정수기…, 있을 건 다 있었다. "정수기는 막걸리를 시원하게 해서 마시는 용도로 쓰고 있어요." 목소리가 작고 사람들 앞에서 수줍음을 많이 탔던 그는 오두막에 오자 모처럼 활기를 찾아 우스개까지 섞어가며 대화를 나눴다.

그는 "그냥 작업실"이라 했지만 널따란 갯벌을 보고 온 눈엔, 그 넓은 갯벌과 바다 그리고 이 좁은 오두막 사이를 부지런히 치열하게 오가는 과정에서 그의 시와 글이 담금질됨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나의 갯벌과 나의 오두막은 어디인가' 하고 속으로 물었다.

신문학기행 참가문의=부산문화연구회 (051)441-0485 동보서적 803-8000 http://문학기행.kr


▶이윤학 시인은

1965년 충남 홍성 출생. 동국대 국문학과를 나와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먼지의 집'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등 시집 6권과 산문집 '환장'을 냈고 '왕따' '내 새를 살려줘' '샘 괴롭히기 프로젝트' 등 눈길 끄는 장편동화를 펴낸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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