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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제공=이경순(사진가·부산영광갤러리 관장) |
일본의 차문화가 선차의 모습을 제대로 띠게 된 것은 '와비차'에 이르러서였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 처음 차문화를 들여온 것은 선승들이었고, 이것을 대중화한 것은 무사들이었다. 그러나 초기 차승(茶僧)들은 대부분 차의 약리적 효능에 집착하였고, 무사들은 차의 문화적 공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가마쿠라(鎌倉) 시대 이후 막부가 형성되고 장군이 권력을 잡게 되자 무사들은 문화적 인사로 변모했다. 그러나 무사들은 제대로 된 차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중국의 서원(書院)을 흉내 내어 당시 일본의 실정에 비추어 엄청나게 큰 집인 쇼인즈쿠리(書院造)를 짓고, 나중에는 건물의 안팎을 금과 은으로 장식하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화려한 차실에서 개최되는 차회에서는 주로 중국에서 사 온 고가의 당·송 시대의 차 도구를 사용하였고, 차도 엄청나게 비싼 것들을 썼다. 무사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곧 문화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또한 찻자리의 참석자들은 앞사람의 차회의 화려함에 촉발되어 뒷사람은 더 화려한 차회를 개최하려고 분발했다.
무라다 쥬코(村田珠光)는 이러한 서원차를 와비차로 혁신하고자했다. 그는 우선 쇼인즈쿠리 내의 다다미 20첩 넓이의 차실 안에 다다미 4첩 반의 넓이로 축소된 차실을 병풍으로 둘러막아 조성했고, 아울러 당물(唐物) 대신 시중에서 조잡하게 만들어진 잡기류들을 차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차실에 도코노마(床の間)를 설치하고 선어(禪語)를 괘물(掛物)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그였다.
'와비(侘び)'란 말은 원래 '외롭다', '시시하다'는 의미를 가진 일본의 서민적 정서를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쥬코는 이것을 새로운 일본 차문화의 미의식으로 적용시킨 것이었다. 이런 면에서 무라다 쥬코는 진정한 일본식 선차 문화를 연 차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케노 조오(武野紹鷗)는 무라다 쥬코가 조성한 쇼인즈쿠리 내의 다다미 4첩 반 넓이의 차실을 아예 독립된 건축물 양식으로 발전시켰다. 차실의 지붕도 기와를 사용하지 않고 나무판자나 나무껍질 등으로 이었고 벽은 흙으로 발랐다. 그 역시 쥬코와 같이 일반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잡기류를 선호하였지만 그는 그릇의 외형미보다는 내재미를 더욱 모색하였다. 조오는 일본 서민들이 사용하는 잡기류에 일본 서민들의 정신이 들어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는 쥬코가 시작한 와비차의 정신을 더 깊숙이 내면화하고 일본화시켰다. 다만 이 시기에는 당시까지 400년간 지속되어 오던 화려한 당물을 선호하던 풍조 대신 사카이 상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문화인들 사이에서 조선의 문화와 기물을 중시하는 사조가 일어났는데 이런 시대적 분위기도 한 몫을 했다.
센노리큐(千利休)는 쥬코와 조오가 시작한 와비차를 완성시켰다. 리큐는 조오의 초암(草庵) 차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정형화시키고, 거기에서 행해지는 다례의 형식을 다듬었다. 리큐의 다법은 극히 자연스러움을 표방하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면, '꽃은 한 송이만 꽂되 들에 피어 있는 것과 같이, 다실은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찻잔은 깨어지거나 금이 간 것도 소중하게 사용하고, 차회는 정해진 시간보다 좀 일찍 마치고, 언제나 자리를 함께 한 손님들에게 마음을 쓸 것' 등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평범한 리큐의 다법에는 이미 무애(無碍)의 경지에 이른 달인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이 느껴진다. 그가 야마자끼(山崎)의 묘희암(妙喜庵)에 지은 다다미 두 간의 조그마한 다실 다이얀(待庵)은 후인들은 이를 초암차실의 표본으로 여기고 있으며 '주옥(珠玉)의 소우주', 혹은 '일본미 중의 일본미'로 일컫고 있다.
쥬코나 죠오, 리큐와 같은 일본 와비차의 초기 창시자들의 공통점은 모두 화려함보다는 고적함을 중시하는 선차(禪茶)의 미의식을 바탕에 두고 있다. 이것은 곧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미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평소에 이와 같은 와비차를 창안한 초기의 일본 차인들도 존경하지만 이를 계승하여 오늘날의 일본 다도를 확립한 일본의 차인들 모두 대단하다고 여기고 있다.
동의대 철학·윤리문화학과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