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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동적 도시국가의 전형인 싱가포르 시가지 전경. 멀리 보이는 곳이 세계 1위의 컨테이너 항만인 싱가포르항이다.이승렬 기자 bungse@kookje.co.kr |
싱가포르항과 부산 신항
부산 신항과 형태가 유사한 싱가포르 파시르판장 항. 지난달 말 이곳을 방문했을 때 싱가포르항만공사(PSA) 관계자는 '놀랍게도' 중앙통제센터와 원격크레인 조정실을 기자에게 공개했다. '한국 언론 사상 첫 공개'라고 그는 의미를 부여했다. 원격크레인 조정실에는 근무자 7명이 각각 크레인 6대씩을 맡아 '클릭!'으로 하역작업을 하고 있었다. 부산에서 온 낯선 이방인에게 항만 핵심시설을 보여준 이유는 뭘까.
"이 원격조정실을 통해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정확한 항만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파시르판장 항 내 크레인뿐 아니라 멀리 떨어진 탄종파가, 케펠, 브라니 등 3개 항의 크레인까지 조정할 수 있다. 크로스 원격 시스템이다. 얼마전 한국에서 벌어진 전산망 에러에 의한 항만작업 스톱 같은 사고는 근본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
PSA 관계자는 자신에 찬 어조로 그들의 항만 소프트웨어 설비를 소개했다. 그는 항만의 경쟁력은 부두시설뿐만 아니라, 운영 노하우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항만 물동량 처리 세계 1위의 싱가포르항은 부산 신항 30개 선석중 일부 선석의 운영권을 노리고 있다. PSA는 현재 부산 신항의 지분 16%를 보유한 주요 주주다. 그들의 의도는 명백했다. '봐라, 이 정도면 최고의 항만 소프트웨어 아니냐!'
이에 비해 부산은 여전히 홍보가 허술하다. 지난 16일 부산 도시재생포럼에 참가한 국내외 도시 분야 전문가들은 부산 신항을 방문하며 다소 짜증을 느껴야 했다. 섭외가 제대로 안돼 한참을 기다려야 했던 것. 현장을 둘러 본 홍콩대 물류학과 베키 루 교수는 '더 확실한 홍보'를 주문하기도 했다.
부산 신항에는 두바이와 홍콩의 부두운영사들도 들어와 있다. 두바이의 국영기업인 두바이포트월드(DPW)가 신항 1-1단계 6개 선석을 운영중이고, 홍콩 허치슨포트홀딩스는 북항내 5개 선석을 운용중이다. PSA를 포함한 이 세곳은 세계 3대 항만 운영사로 통한다. 이들 모두는 공교롭게도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도시국가다. 이들은 도시국가의 생존 및 미래 전략으로 항만물류 및 부두운영 분야에 최고 경쟁력을 쌓았다. 이들이 호시탐탐 부산항을 노린다는 것은 그만큼 투자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바꿔 생각하면 부산이 하루빨리 글로벌 경쟁체제를 갖춰야 함을 역설한다. 항만을 거점으로 세계 무대를 누비는 이들 도시국가에 비하면 부산은 여전히 규제에 묶여 운신의 폭이 좁은 지방도시일 뿐이다.
역발상으로 모델 찾기
초점은 다시 '도시국가'로 돌아온다. 부산은 과연 도시국가가 될 수 있을까. 많은 독자들이 의문을 갖고 물어왔다. "국가 안의 국가 논의가 가능하냐." "분권도 제대로 안되는 마당에 너무 앞서가는 주장이다." "국가라는 이름을 붙이고 중앙과 어떻게 협상이 되겠느냐." "태생과 출발이 다른데 부산이 어떻게 싱가포르나 홍콩처럼 될 수 있느냐" "도시국가가 되면 정말 잘 살게 되느냐"….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의문들이다.
이번 시리즈의 기획 의도는 이같은 의문들을 녹여 어젠다로 담아내고, 각 분야별 전략 과제를 짚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역발상으로' 한 번도 꿈꾸지 않았던 '도시국가론'을 제기한 것이다. 부산이 하나의 작은 국가처럼 고도의 자치권을 갖고 경제적 자율권을 누리며 세계와 경쟁하면 어떻게 될까. 이럴 경우 중앙과 지방이 대립해온 자치와 분권 논의가 전혀 새롭게 전개되고 삶의 질이 향상되지 않을까 하고 상상해본 것이다. 이 역시도 역발상이 아닐 수 있다. 지금까지 제기돼온 부산 발전 및 비전의 연장선상에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해양특별시, 세계도시, 해양중심도시 등이 그런 개념이다.
논란은 처음부터 예상했다. 논란을 통해 논의의 방향과 해법을 찾아본다는 복안도 있었다. 결코 하루 아침에 이뤄질 수 없는 일이기에, 목표 지점을 2048년쯤으로 멀찌감치 잡았다. '달'에 못가면 '별'에라도 간다는 생각으로.
부산이 찾는 도시국가의 모델은 반드시 홍콩이나 싱가포르, 두바이가 아닐 수도 있다. 그쪽과 부산은 역사 문화 사회적 배경이 다르고, 정치 체제가 다르다. 경제적 자유도에 있어서도 차별화·특성화가 필요하다. 싱가포르나 홍콩을 주목하는 것은 행정적 경제적 자율성에 있어 참고할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고도의 자치권과 깨끗한 공무원, 고급 인재 운용 시스템, 개방성(다민족)과 글로벌 마인드, 물류(항만) 금융·비즈니스·관광 중심지 전략 등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볼수 없는 벤치마킹 목록들이다. 부산이 입어야 할 도시국가의 '정신과 의상'은 어쩌면 '해양 비즈니스 도시' 또는 '해양도시 공동체'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명칭이 아니라 도달해야 할 목표, 즉 함께 잘 사는 행복한 도시, 그런 세상일 테니까.
현실적으로 통용되는 '도시국가(City-state)'는 초월적 정치체계나 국가만을 뜻하진 않는다. 부산대 이철호(국제정치) 교수는 "뉴욕은 도시지만 형태는 도시국가다. 독일의 연방들도 도시면서 국가 형태로 굴러가고 있다. 국가라는 틀 안에서도 자주적 자율적으로 움직이면 그게 도시국가인 것"이라고 했다.
단계별 접근 전략
우리가 꿈꾸는 도시국가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할 수 있다. 여기엔 크게 정치적 행정적 독립 과제와 경제적 문화적 의식적 과제가 놓여 있다. 문화적 의식적 과제는 중앙 정부에 의지하지 않고도 시민적 합의로 하나하나 풀어나갈 수 있으나, 행정적 경제적 과제는 중앙정부와의 절대적인 협상을 요한다. 싱가포르나 홍콩이 보여주듯, 도시국가가 되려면 행정적으로 고도의 자치권과 자주성이 확보되고, 경제적·사회적으로 4무(무비자, 무규제, 무관세, 무언어장벽)가 실현되어야 한다. 선진 교육시스템과 글로벌 시민의식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 다가서는 전략이 '국제자유도시'다. 이는 도시국가로 가는 법적 제도적 장치다.
4무는 그 어느 것 하나 간단치 않은 난제다. 무규제만 하더라도 환경·노동 분야의 규제를 건드려야 하므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무관세의 경우 신자유주의가 논란이 될 수 있고, 무언어장벽(영어공용화) 역시 긴 시간을 두고 연구, 추진해야 할 과제다.
동의대 최봉호(국제경제학) 교수는 "도시국가는 국제자유도시를 아우르는 총체적 개념으로 부산의 원대한 비전이 될 수 있다"면서 "기존의 부산시 정책을 총괄적으로 평가 정리해 실행 가능한 것들을 분석, 고리를 끼우는 작업부터 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문희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장은 "경제자유구역을 도시국가 건설의 전초기지로 활용할 수 있다"며 부산 발전의 새로운 실마리를 여기서 찾아보자고 말한다. 경제자유구역이 전초기지가 될 경우, ①경제자유구역 활성화→②노비자·무규제·무관세 실현(교육 선진화, 금융 허브화 병행)→③부산 전역 국제자유도시(자치권 확보)→④도시국가(연방제 혹은 1국2체제)→⑤글로벌 도시국가로의 점진적 이행 로드맵이 제시될 수 있다. 광역개념이 적용되면 ①통합 광역경제권→②광역행정권→③국제자유도시(광역 자치권)→④도시국가→⑤글로벌 도시국가(초광역경제권) 식으로 더 복잡해진다. 이행 단계 단계마다 시민적 공감대와 통치권적 결단, 기존 법 체계를 뛰어넘는 특별법 등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래도 가야 하는 길
난제와 난관에도 불구하고, 부산(동남권)이 살 길은 이 길밖에 없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다. 21세기 지식경제시대의 세방화(지방화+세계화), 네트워크화에 대처하려면 강한 체력의 '도시국가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부산의 위기와 미래를 서울이 해결해줄 수 없다는 점에서, 도시국가론은 지역발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부산대 임정덕(경제학) 교수는 "부산이 살길은 세계도시(도시국가)인데도 지금까진 구호 수준에 머물렀다"면서 "먼저 공무원과 지식사회, 언론부터 일류가 되어 변화를 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부산시도 위계 질서가 아닌 업무·능력 중심으로 조직을 바꿔야 하며 대학도 철저한 경쟁체제가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부산-규슈 초광역경제권 논의도 실질 협력을 이끌어내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성균관대 박명섭(경영학) 교수는 "부산-후쿠오카를 내항 항로로 규정, 비자없이 통항하게 한다든지, 부산항과 하카다항을 하나로 묶어 전략적 연계를 통한 시너지 효과를 얻는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도시국가론과 관련, 박 교수는 경제적인 접근뿐만 아니라, 문화 사회 환경적 측면도 고려해 논의할 문제라고 덧붙였다.
부산발전연구원 이계식 원장은 "전략과 대안은 다 나와 있다. 문제는 실행 의지(리더십)와 시민정신이다. 하고자 하는 뜻이 얼마나 뜨겁게 결집되느냐가 관건일 것"이라고 했다. 그는 "부산에 와서 맨파워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고 있다"면서 "조만간 '서울·부산(SB) 명사 포럼'을 만들어 부산의 전략적 비전을 찾아나갈 생각"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