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이 도시국가가 되려면 어떤 전략이 필요한가. 전쟁이나 혁명이 아닌 이상, 단숨에 도시국가에 이르는 길은 없다. 하루 아침에 로마가 만들어지지 않았듯이, 홍콩·싱가포르·두바이도 오래 전부터 나름의 전략과 상상력, 비전을 통해 오늘의 도시국가를 만들었다.
도시국가는 국내에서 아직 개념조차 생소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2006년 7월 출범한 제주특별자치도를 보면 도시국가로 가는 방향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 제주특별자치도는 비록 더디기는 하지만 한걸음 두걸음씩 1국2체제 혹은 연방제, 도시국가로 다가서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의 현장
지난 20일 오전 제주국제공항에서 10여㎞를 달려 도착한 제주시 아라동의 제주첨단과학기술단지 조성부지. 제주대 인근의 야트막한 구릉에 자리잡은 109만5000여㎡(약 33만2000평)의 광활한 땅이 말끔히 단장된 채 입주업체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곳은 지난 2006년7월1일 특별법 발효와 함께 대한민국 최초의 특별자치도로 출범한 '탐라'의 굴뚝없는 첨단 IT·BT산업 육성 비전이 꿈틀대는 현장이다.
이어 서귀포 해안 절벽 위에 건립된 제주국제컨벤션센터를 거쳐 찾아간 서귀포시 예래동의 74만㎡ 규모 '제주휴양형주거단지' 조성 예정지. 중문관광단지의 특급 호텔들이 손에 잡힐 듯 건너다 보이는 바닷가다. 이 특별한 주거단지에는 고급 빌라형 주택은 물론이고 호텔과 상업 및 비즈니스지원시설, 의료시설, 리조트까지 들어선다. 지난해 말레이시아의 한 기업이 제주도와 6억 달러 우선투자협정(MOU)을 맺어 사업에 탄력이 붙었다. 그 곳의 사업 감리단 관계자는 "아직 황량해 보이지만 올 연말 부지조성이 마무리되고 내년부터 시설물 설치가 본격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제주특별자치도. 지방자치법에 '특별자치도'라는 새로운 개념을 올린 제주도에는 지금 '변화와 역발상의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제주의 변화 원동력은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간다는 도전과 실험정신.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완전한 자치권과 자율경제 실현을 통한 '국제자유도시' 건설이 제주 주민들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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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귀포시 예래동 제주휴양형주거단지 조성 부지에서 바라 본 제주국제컨벤션센터. 해안가에 자리잡아 천혜의 풍광을 자랑하는 이 곳은 제주특별자치도의 핵심 전략 산업 중 하나인
국제회의 중심도시 사업의 공간적 무대다. |
도민들의 노력
내국인 면세 쇼핑제도 도입, 입국 제한을 없앤 무비자, 1336건에 달하는 중앙정부 권한의 이양…. 제주특별자치도의 지위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감귤산업 위축과 관광객 감소 등 현실적인 위기감에서 '살아남아야겠다'는 공감대가 자립·자치에 대한 염원으로 나타났고, 중앙정부에 대한 끊임 없는 도전과 요구의 몸부림 끝에 오늘의 제주가 탄생할 수 있었다.
제주특별자치도로 가는 로드맵은 지난 1991년 공포된 제주도개발특별법에서 시작한다. 이후 10여년이 지난 2002년 제주국제자유도시법의 제정에 이어,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법 시행과 함께 대폭적인 권한 이양과 자치경찰권이 수반된 1도 2행정시의 특별행정구역 출범으로 이어졌다. 15년간의 지난한 과정이었다.
2006년7월 출범 당시 "이제 1단계가 마무리됐을 뿐,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라며 단계적 심화 전략을 추진, 지난해 8월 특별자치도법 개정안을 이끌어낸 것도 성과다. 이를 통해 의료법인의 호텔업 겸업 허용, 외국항공사의 운항 확대 방안 마련 등 2단계 제도개선을 관철시켰다. 제주는 올해 말까지 관광3법 일괄 이양 완료 등 중앙정부를 상대로 한 3단계 제도개선 협상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이같은 단계적 추진 전략의 완료 목표 연도는 2011년. 1991년 이후 홍콩과 싱가포르를 합친 일명 '홍가포르 프로젝트'로 불리며 추진된 제주특별자치도의 발전 로드맵은 20년만에 완료되는 것이다.
부산은 뭘 했을까
제주의 발전 로드맵에 부산을 비추어보면, 허우대만 멀쩡하고 구호만 요란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발전 전략에 따른 구체적인 모멘텀(추진 동력)이 없는 것이다. 지난 50년간 부산의 도시발전 정책을 보면 1970년대 항만도시로 방향을 잡은 후, 1980~90년대 항만물류도시, 2000년 이후 해양수도 전략 등을 내놓았지만 결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정책으로까지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접근해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는 제주특별자치도는 '도시국가 부산'이 새로운 전략을 마련하는데, 반드시 참고해야 할 사례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제주의 고민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제주특별자치도가 안고 있는 불안감도 속속 노출되고 있다. 지난달 28일 현지 지역언론사 주최로 열린 '제주특별자치도 추진 전략 토론회'에서 제주대 양덕순(행정학) 교수는 "면세지역화, 항공자유화, 법인세 인하 등 중요 실천 과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실용주의 노선의 이명박 정부 출범은 위기일 수 있다"며 "1국가2체제 도입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면밀한 비전과 전략으로 중앙정부에 접근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제주발전연구원 김태윤 연구실장은 "중앙정부는 재정 지원이 수반되지 않는 권한만을 주려 하고, 제주도정은 특별한 재정 지원을 받으려 하는 등 괴리가 있다. 결국 연방주 수준의 특별자치도 지향점은 재정 계획과 함께 나와야 한다"고 문제점을 꼬집었다.
김태환 제주특별도지사는 최근 "우리의 목표는 제주특별자치도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무비자·무관세·무언어장벽·무규제 등 4무가 실현되고 사람과 상품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 평화와 번영을 동시에 누리는 국제자유도시 건설로 가는 행적적 시스템일 뿐이다"고 밝힌 바 있다. 결국 제주도는 '국제자유도시'라는 목표가 선명한 셈이다.
이에 반해 부산은 이제야 도시 비전에 대해 논의하는 수준이다. '도시국가'란 것도 새롭고 생소한 시스템이 아니라, 제주가 이미 실험하고 있는 틀인 것이다. 부산이 무엇을 고민하고 선택해야 할지 자명해진다. 56만 '탐라인'(제주인)들의 '특별한' 움직임을 취재하고 돌아오는 길, 김해공항 상공에서 바라본 거대 도시 부산은 여전히 잠자고 있는 것 같아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다.
■ 제주특별자치도 양기철 특별자치과장
- "치밀한 전략 없었다면 연방제 수준의 자치실험 꿈도 꾸지 못했을 것"
"부산은 인구·산업구조·교통·교육·환경 등이 상대적으로 양호하기 때문에 제주가 겪은 시행착오들을 되풀이하지 않는 치밀한 전략을 수립해 큰 성과를 내기 바랍니다."
제주특별자치도에만 있는 독특한 부서인 특별자치과를 맡고 있는 행정고시 출신 40대 초반 양기철 과장(지방행정 서기관). 제주가 고향이기도 한 양 과장은 '도시국가 부산'이라는 어젠다를 듣고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이후의 성과는?
▶양적인 잣대로만 성과를 언급하는 것은 성급하다. 여기까지 오는데 무려 15년이 걸렸다. 추가 규제완화 노력 등 여전히 '제주 100년 대계'를 위한 과정의 연속선상에 있다.
-도민 의식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했나?
▶2006년까지는 행정 주도적 분위기에 미온적이었던 도민들이 한미 FTA 협상 등을 계기로 최근 '이 길만이 다함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 도민들의 의식 변화는 국가 내의 또 다른 국가, 연방주 수준의 고도로 자치화된 '국제자유도시 제주'의 비전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 된다.
-제주특별자치도의 위상과 의의는?
▶제주는 규제완화와 해당 지역의 특성에 맞는 산업육성을 통한 국제자유도시 건설, 권한 이양을 통한 지방자치의 완성이라는 2가지 실험을 하고 있는 곳이다. 물론 지역의 목소리가 중앙정부를 설득해 낸 결과다. 이제는 국내 최초라는 우월적 지위에 기대기 보다 진정한 자치경영 능력을 길러야 할 때다.
-'도시국가 부산'에 대한 느낌을 말해달라.
▶처음 들었지만 국내외 도시들의 생존 경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해 지고 있는 추세를 감안하면 놀랍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명칭이 아니라 하나라도 성과를 내는 것이다. 무엇보다 민·관이 힘과 지혜를 모아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