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남부선 철길. 바다가 따라오고 바다가 따라가는 동해남부선 철길은 오는 길도 가는 길도 같다. 오는 길은 가는 길이 피해 주고 가는 길은 오는 길이 피해 주면서 길은 이어진다. 사진=박정화

쇠다. 쇳소리다. 쇠가 내는 소리다. 쇠와 쇠가 맞물리면서 내는 소리다. 한 쇠가 다른 쇠에게 다가가면서 한 쇠가 다른 쇠를 받아들이면서 내는 소리다. 쇠와 쇠가 함께 가는 소리다.

쇳소리가 끌고 가는 길이다. 쇠와 쇠가 맞물리면서 내는 소리가 끌고 가는 길이다. 소리가 멈추면 길도 멈추고 길이 멈추면 소리도 멈춘다. 소리가 길이다. 길이 소리다. 길과 소리가 함께 간다. 길과 소리가 하나다.

바다가 따라오는 바다가 따라가는 동해남부선 철길. 동해남부선 철길은 오는 길도 가는 길도 같다. 하나다. 오는 길이 가는 길이며 가는 길이 오는 길이다. 오는 길은 가는 길이 피해 주고 가는 길은 오는 길이 피해 주면서 길은 이어진다. 길을 이어간다.

기차가 지나간다. 짐차 같은 기차가 지나간다. 기차가 흔들리고 소리가 흔들리고 길이 흔들린다. 철길은 흔들리면서 가는 길이다. 흔들면서 가는 길이다. 흔들리면서 흔들면서 등불 켜고 기다리는 마을을 찾아가는 길이다. 등불 켜고 기다리는 그대를 찾아가는 길이다.

'기차가 흔들리면/마음도 따라서 흔들린다/흔들리면서 가는 길/마음을 흔들면서 가는 길//그대에게 가는 길도/언제나 흔들렸으리/흔들리면서 흔들리면서/그대에게 갔으리(뒷부분 생략)' -저 봄꽃

그대에게 가는 길은 흔들린다. 봄꽃 같은 그대에게 가는 길은 언제나 흔들린다. 지고 없는 봄꽃 같은 그대에게 가는 길은 언제나 언제나 흔들린다. 그대에게 가는 길은 끊기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는다. '저 봄꽃'은 끊기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는 길 위에서 쓴 시다.

기차가 지나간다. 쇳소리가 난다. 사람을 순간적으로 얼어붙게 하는 소리다. 간담을 쓸어 내리게 하는 소리다. 철길은 쇳소리가 사람을 놀라게 하는 길이다. 사람을 물러나게 하는 길이다. 앞을 보게 하고 뒤를 보게 하는 길이다.

앞을 보고 뒤를 보는 일. 말은 쉬워도 쉬운 일은 아니다. 앞을 봐야 하는데 뒤를 보는 경우가 허다하고 뒤를 봐야 하는데 앞을 보는 경우도 허다하다. 앞도 안 보이고 뒤도 안 보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앞도 안 보고 뒤도 안 보고 지금 여기 발 밑만 보는 경우는 또 얼마나 허다한가.

철길을 따라오는 철길을 따라가는 바다가 쇳소리를 적신다. 파도가 쇳소리를 누그러뜨린다. 기차가 지나가면서 내는 소리는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다. 거슬리는 소리다. 쇳소리를 적시려고 쇳소리를 누그러뜨리려고 동해남부선 철길은 바다를 곁에 둔다. 파도를 곁에 둔다.

쇳소리는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지만 듣지 않으면 안 되는 소리다. 들어야 할 소리다. 육중한 쇠와 쇠가 맞물리면서 쇳소리가 나듯 쇳소리는 쉽게 듣는 소리는 아니다. 쇳소리를 듣고 있으면 쇳소리를 듣는 일도 쇳소리를 내는 일도 어렵단 걸 실감한다. 나에게 하는 쇳소리를 듣는 일도 내가 쇳소리를 내는 일도 어렵단 걸 실감한다.

듣기 싫은 말을 듣고 듣기 싫은 말을 한다는 것. 듣기 좋은 말만 듣고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지낼 수야 없겠지만 내가 언짢고 남을 언짢게 하는 그런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기에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받아넘기기에는 나는 아무래도 그릇이 작다. 아무래도 사람이 잘다. 쇳소리를 내는 철길은 두 가지 면에서 나를 돌아보게 한다.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으려고 했던 나와 나도 듣기 싫은 말을 남에게 했던 나. 내가 무어 완벽한 사람이라고 듣지 않으려고 했는지 내가 무어 완벽한 사람이라고 말을 함부로 했는지 돌아보게 한다. 나를 반성하게 한다.

기차가 지나간 지 제법 되건만 오는 기차도 가는 기차도 기척이 없다. 동해남부선 철길은 오는 기차도 가는 기차도 뜸한 철길이다. 다니는 기차도 느리지만 그나마 다니는 기차가 뜸한 철길이다. 기차가 뜸하다 보니 군데군데 있는 역 대합실도 사람이 비어 있기 일쑤다. 타는 사람도 역무원도 비어 있기 일쑤다.

일광역도 그런 역 중의 하나다. 일광역은 오는 기차도 하루 세 번 가는 기차도 하루 세 번 서는 간이역이다. 근동에서는 기차가 서는 횟수가 가장 적은 역이다. 역장도 없고 역무원도 없는 역이다. 일광역은 그래서 푸근한 역이다. 역무원 눈치 보지 않고 대합실에서 죽칠 수 있는 역이고 내키는 대로 철길을 걸을 수 있는 역이다.

"저기 저 꽃 핀 이팝나무 보이지요? 거기 모퉁이를 돌아서면 문학비가 보일 겁니다." 역을 나와서 오영수 문학비를 찾아간다. 문학비는 소설가 오영수가 쓴 '갯마을' 배경 장소인 일광 바닷가에 세워져 있다. '갯마을'은 갯가 여인들 삶을 오목조목 그려낸 단편소설. 문학비가 요 어디 짬에 있다는 건 아는데 일광다리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기억이 어렴풋하다.

다리 왼쪽에 김밥집이 보인다. 김밥집 아주머니는 친절하다. 오영수 문학비도 가르쳐 주고 윤선도 시비도 가르쳐 주고 일광 삼경이 이팝나무 갈매기 등등이라고도 가르쳐 준다. 김밥집 주인은 환갑을 갓 넘긴 김은해 아주머니. 친구랑 일광에 놀러 왔다가 풍광에 반해서 그냥 눌러앉은 게 삼 년이란다. 부산 사람이지만 지금은 일광 사람이란다.

"일광 원래 이름 아인교." 김밥집 상호는 빛마을. 가게에 빛이 잘 들어와서 지은 상호인가 싶던 차에 묻기도 전에 내력을 밝힌다. 친절한 사람이 그렇듯 설명이 길어진다. 보여줄 게 있다며 가게 안으로 끌어당긴다. 가게 안에는 영화 포스터도 보이고 한 장 한 장 뜯어서 코팅한 영화 잡지도 보인다. 이 가게가 나오는 영화이고 이 가게 사진이 나오는 영화 잡지이다. 빛마을 김밥집은 영화에 나온 명소다, 흐뭇함이 읽힌다.

해안선에 선다. 매립되고 포장된 해안선이지만 해안선 바로 앞은 갯바위다. 따개비도 붙고 굴 껍질도 붙은 갯바위들이 여기가 갯마을임을 일러 준다. 소설에 나오듯이 '더께더께 굴딱지가 붙은 모 없는 돌로 담을 쌓고, 낡은 삿갓모양 옹기종기 엎딘 초가가 스무집 될까 말까'한 빛마을이 있었음을 일러 준다. 철길 쪽에서 쇳소리가 길게 들린다. 굴 딱지가 붙은 돌담이 들썩거리고 삿갓 지붕이 들썩거린다. 게가 갯바위 틈새로 얼른 숨는다.


# 바다를 사랑했던 오영수 돌이 되어 곁에 머무르다

일광 바닷가에 있는 오영수 소설 '갯마을' 현장 기념돌. 1997년 기장문인협회가 세웠다.

오영수(1914-1979). 주로 서민들의 소박한 삶을 따뜻한 시각으로 들여다본 소설가. 갯가 청상과부의 사랑과 일상을 담은 '갯마을'은 오영수 대표작이다. 울주군 언양면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공부했으며 만주 등지를 방랑하다 1943년부터 일광면에 자리잡았다. 일광에서 김동리 등과 교분을 쌓기도 했다. 경남여고와 부산중학교에서 국어와 미술을 가르쳤다.

1950년 단편 '머루'가 서울신문에 당선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4년 서울로 올라가 조연현과 월간 '현대문학'을 창간해 초대 편집장을 맡았다. 조연현은 부산 피난생활 때 오영수의 도움을 받은 문학평론가다. 이후 현대문학은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한국문학을 상징하는 문예지로 자리잡는다.

1977년 지병인 위궤양으로 울주군 웅촌면 곡천리로 낙향했다. 당시 최해군 윤정규 정종수 윤진상 정형남 등 부산 소설가들 왕래가 잦았다. 1978년 연말 '문학사상'지에 발표한 단편 '특질고'가 지역 감정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공개 사과하고 절필을 선언하는 심적 고통을 겪었다. 이듬해 5월 타계했다. 판화가 오윤(1946-1986)이 그의 장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