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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천동 고분 전시관 전경 |
부산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은 복천동 우성베스토피아 아파트 위쪽 마안산 중앙부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은 구릉 위에 밀집 분포돼 있다. 구릉에는 지난 1996년 복천박물관 개관과 동시에 문을 연 야외전시관이 있어 이곳에서 조사된 53, 54호 무덤 내부를 직접 들여다 볼 수 있다.
간혹 기자에게 "복천동고분군과 복천박물관에 다녀 왔는데도 성격을 잘 모르겠다"는 독자들의 전화가 걸려온다. 이런 독자들을 위해 복천고분군의 성격을 간략히 말한다면 '6세기 이전 부산지역 유일의 지배자 계층 무덤군으로 그 중심 시기는 4, 5세기'라고 할 수 있다. 덧붙인다면 특히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까지의 함안토기와 왜계토기, 그리고 5세기 후반대의 창녕토기 등이 조사돼 부산지역과 이들 지역 간의 교류관계도 알 수 있다.
복천고분군은 지난 81년 6월 사적 제273호로 지정됐다. 구릉의 아래에서 위쪽으로 조성된 이 고분군에 대한 발굴은 1969년 9월 동아대가 1호분을 조사하면서 시작됐다. 이 조사에서 부산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금동관이 출토됐고, 다량의 철정(鐵錠·철덩어리)도 나와 대형 무덤의 존재가 예시됐다. 그 이후 지금까지 이 고분군에 대해 6차례의 계획조사와 10여 차례의 긴급조사가 이뤄졌다.
복천동고분군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지난 80년 부산시가 고분군이 위치한 구릉 일대에 대한 주택조성계획을 수립하면서 진행됐다. 이에 따라 그해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4개월에 걸쳐 복천동고분군 제1차 발굴조사가 실시된 것이다. 발굴조사 결과 이 지역이 대규모의 삼국시대 고분군임이 확인됐으며, 갑주(갑옷과 투구)와 마구 등 많은 철기 자료가 나왔다. 이후 지속적인 발굴이 이뤄져 구릉의 정상부에는 부곽(부장품을 따로 넣어 두는 방)이 있는 대형 무덤이, 그 주변과 경사면에는 중·소형급 무덤들이 산재한 것으로 파악됐다. 따라서 이러한 무덤 배치를 통해 당시의 사회계층 문제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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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머리 가리개 |
복천박물관 측은 "이 고분군은 목곽묘에서 수혈식 석곽묘로, 그리고 횡구식 석실묘로 변화하고 목곽묘와 수혈식 석곽 내에서도 여러 단계의 변화를 보인다"며 "이와 같은 무덤의 변화는 가야지역의 무덤 가운데 가장 뚜렷하기 때문에 가야 무덤의 구조와 변화를 연구하는데 있어 하나의 지표가 된다"고 유적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 고분군 위에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집을 짓고 산 덕에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는 달리 거의 도굴이 되지 않았다. 복천동 고분군은 경주지역처럼 화려한 금제 유물은 많지 않지만, 대신 한반도 전체에서 조사된 고분군 가운데 갑옷이 가장 많이 나와, 갑옷의 형태와 변화 연구는 물론 당시 남부지방의 정치 상황과 국제관계를 규명하는데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복천박물관 측은 "또 11호분의 부곽인 10호에서 말머리가리개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나와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고 밝혔다.
신경철 부산대 박물관장은 "4세기 대 낙동강 하류역인 복천동고분군과 대성동고분군에서 나오는 이러한 갑주와 마구들은 이 무렵 금관가야의 실태를 해명하는 데 뿐만 아니라, 영남지역 여러 집단 간의 역학관계를 규명하는 데 제1급 자료"라고 해석했다.
복천동박물관 이현주 학예사는 "복천동고분군은 5세기 전반 이후부터 이 지역의 전통적인 토기와 함께 신라토기가 섞여 나온다"며 "시기가 늦을수록 신라계 토기의 양이 많아지고 있어 부산지역이 신라의 지배로 편입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