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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로 미술가 김원 선생이 9일 부산 동구 수정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근황과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
문학 미술 음악 등 문화예술 각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다 고령으로 잠시 쉬고 있거나, 젊었을 적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작업을 하고 있는 원로 예술인들을 탐방, 그간의 안부를 묻고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보는 글을 매주 한 차례씩 싣는다.
원로 미술가 김원(84) 선생 댁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기자가 몇년 전 미술 분야를 담당할 때 취재 차 방문한 적이 있었으나 몇 년 사이 골목길이 확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지하철 부산진역에서 내려 수정 산복도로 가는 차도를 따라 수정초등학교를 지나 가파른 길을 100여 m 오르다 보면 왼쪽에 보경 세탁소가 보인다. 그 옆 확장된 길로 내려서자마자 왼쪽 골목길로 꺾어들어 20m 쯤 가면 김원 선생 댁이 있다.
마당에 있는 김 선생의 작업실은 수년 전이나 변함이 없었다. 40평가량 되는 이 집을 김 선생이 1953년부터 살았으니 50년의 세월이 넘었다.
"당시 이 집으로 이사올 때는 집이라기보다는 판자를 잇대놓은 말 그대로 '판자집'이었다"는 그가 별도로 만들어 쓰고 있는 작업실은 3평 정도였다. "두 달 전 작품을 하나 완성하고는 아직 붓을 못잡고 있다"는 김 선생은 "앞으로 10년가량 더 작업을 해보고 잘 되면 5년 더 그림을 그릴 생각"이라고 식지 않은 창작의지를 피력했다. 김 선생의 호는 '파춘(巴春)'이다. 파춘은 그의 고향인 함경남도 정평군 문산면 풍양리 108에 있는 본가의 별칭이다.
7남매의 외동 아들로 평안도 강서 보통학교 교사였던 그를 아버지가 "세상이 바뀌어 이곳에 더 살 수가 없다. 장손인 네 혼자라도 살아야 한다. 남한으로 내려가라. 가서는 너에게 불이익이 될지도 모르니 절대 부모나 고향을 찾을 생각을 하지마라"고 떠밀어 1946년 혼자 서울로 내려온 것이다. 아내(82)는 1년 뒤 내려왔다. 서울에서도 교편을 잡다가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부산으로 피란을 와 지금껏 부산에 살면서 작업을 하고 있다.
"40년가량 부산 동아중학교에서 미술교사를 했지요. 학교 측의 배려로 교실보다 큰 미술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작업을 했습니다." 그림을 독학하다시피한 그는 그동안 18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지난 60년대부터 오브제 작업을 한 그를 두고 미술평론가 김강석 씨는 '김원에게 모든 물질은 표현 재료다' '한국의 조형 혁명가' '지칠줄 모르는 모험가 실험을 하는 작가'란 표현을 썼다. 작품마다 완성 연도와 번호를 매기는 그의 기록집에는 1363점이 등록돼 있다. 그는 기자에게 기록집을 보여주며 "지금 11권까지 만들었으니 앞으로 한 권이 더 채워지면 죽어야지요"라고 말했다. 기록집에는 자신의 작품을 손수 촬영한 사진을 모아 놓았다.
그에게 전시 도록이 많이 송부돼 온다. "개별 작가들이 보내오는 전시 도록 중 미안한 말이지만 대부분 꼼꼼하게 보지 않습니다. 작품에 진정성이 많이 없어요. 너무 가볍게 작업을 하는 것 같아 우울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그 말은 작업에 대한 치열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부산에 화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1000명이 넘지만 관심을 가질만한 작품들이 드물다는 이야기이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전시장을 찾는다는 김 선생은 "요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창의성보다는 모방성이 강해 안타까울 때가 많다"며 "모 전시장에서 입바른 소리를 한번 했다가 악다구니를 서며 대드는 경우를 당하고는 그저 작품만 구경한다"고 씁쓰레해 했다.
"아들과 딸들이 별 걱정없이 잘 살고 있고, 손주들도 공부를 잘하고 착하니 이만하면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셈"이라고 김 선생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처음으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작업실 문 위쪽에 고향집을 소재로 한 그림에 부모님 증명사진을 확대해 붙여놓은 그는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일절 고향을 찾지 않았다"며 "부모님은 당시 대지주여서 배척 당해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다"고 암울했던 우리 역사를 회상했다. 그는 지난 75년 한국미협 부산지부장을 지내고 97년 부산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제자로는 신라대 김청정 교수와 부산대 김정명 교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