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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방후원분으로 알려졌으나 둥근 무덤 3기가 겹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된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군 A호분 전경. 작은 사진은 유공광구소호(외래계). |
2000년 2월 23일 본지가 '고성 송학동 고분군은 전방후원분과 무관' 제하의 특종기사를 보도하자 당시 한일 양국 고고학자와 고대사학자들은 "마치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 순간적으로 멍했다"는 표현을 썼다. 당시 이 기사는 고고학계와 고대사학계에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동아대가 1999년 11월 15일부터 2000년 3월 9일까지 송학동 고분군 시굴조사를 하던 중에 본지 취재진이 현장에 가 취재를 해 보도를 한 것이다.
당시 본지 보도로 인해 역사학계가 발칵 뒤집어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고분 전공 고고학자인 강인구(현 한국학연구원 명예교수) 박사가 80년 대부터 '송학동 고분군은 전방후원분으로 일본 전방후원분에 영향을 줬다"고 주장해 왔고, 국내 고고학계와 고대사학자들은 그 주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였던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전방후원분이라는 송학동 고분군이 늘 눈엣가시처럼 거추장스러웠다. 본지 기사가 나간 직후부터 오죽했으면 일본인 고고학자와 고대사학자 등 관계자들이 300여 명이나 다녀갔을까.
사적 제119호로 지정된 송학동 고분군이 있는 고성 지역은 삼한시대에는 고자미동국(古資彌銅國)으로 칭해졌다가 삼국시대에는 흔히 소가야로 불리는 고자국(古自國)으로, 신라 때는 고생촌에서 고자군으로 불리다가 경덕왕 때 지금의 고성군으로 개명됐다. 송학동 고분군 발굴을 총지휘했던 심봉근 동아대 박물관장은 "송학동 고분군은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중반까지 조성된 고자국(소가야)의 왕이나 수장급에 해당하는 사람의 무덤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지금은 이 고분군이 정비돼 거의 조성시기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발굴 당시는 정상 부위가 도굴과 훼손으로 깎여나가 마치 전방후원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고분군은 1914년 일본인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에 의해 도굴 수준의 발굴이 이뤄진 뒤부터 끊임없이 도굴이 자행됐다.
이 고분군은 시굴조사 후 국내외 학자들의 주목으로 3차례의 정밀발굴(2000년 7월 10일~2002년 3월 20일)이 이뤄졌고, 당시 노태섭 문화재청장을 비롯, 문화재위원들과 국내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다녀갔다. 동아대 박물관 측은 "당시 이 고분군의 보다 명확하고 객관적인 조사를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의 협조를 받아 지자기 사전조사를 실시했고, 또 가와카미 일본 카시하라고고학연구소 부소장을 비롯, 큐슈대학 등 3개 대학의 교수와 연구자들을 초청해 공동조사를 벌이고 자문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송학동 고분군의 1호분은 최종적으로 전방후원분이 아니고 3기의 대형 둥근 무덤(圓墳)이 중복해 배치된 것으로 확인됐다. 즉 1A호분이 구릉 남쪽 정상부에 먼저 설치되고 다음 북쪽 구릉 정상부에 1B호분이, 마지막으로 양 고분 중간에 1C호분이 각각 조성됐다. 그리고 각 고분은 추가장 등으로 판단되는 소형 석곽들을 같은 무덤 내에 설치한 경우도 있었다. 1A호분은 다곽식으로 가야지역 고유의 전통묘제라고 할 수 있는 수혈식 석곽 11기가 축조시기를 각각 달리하며 설치돼 있었다. 1B호분은 당시 가야지역에서는 생소한 새로운 묘제로 횡혈식 설실 유구가 설치돼 있었는데, 석실과 연도 내부에 붉게 도장을 한 외래적인 요소가 강했다. 1C호분은 시기적으로 좀 늦은 6세기 전반에서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됐다. 1A호분은 봉분을 먼저 만들어 석곽을 배치했으나 B호분은 생땅에 석실의 벽면을 만들면서 동시에 흙을 쌓아 봉분을 올려 축조했다. 유물로는 유공광구소호(구멍이 있는 주둥이가 넓고 키가 작은 항아리) 등 신라류 토기는 물론 일본의 토기와 유사한 형태의 토기도 발견돼 소가야의 교류관계를 짐작하게 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송학동 고분군의 발굴 결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심 관장은 "송학동 1호분이 형태상으로는 전방후원분이 아니지만 그 축조수법이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의 특징은 전방후원분이 분포하는 우리나라 전남 해안지방과 일본 큐슈지방의 고분들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