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 하대유적 23호분 전경. |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 하대유적이 세상에 알려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현재 경상대 박물관장인 조영제 교수다. 당시 부산대 사학과 4년생이었던 조 교수는 이 유적의 아래 동네가 고향으로 고고학을 하겠다고 뜻을 세운 터라 수시로 고분군이 형성돼 있었던 뒷산인 일명 '부처골'에 자주 올랐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산에 올라가 보니 무덤이 파헤쳐져 있어 순간적으로 도굴됐다는 생각이 들어 안을 살펴보니 토기가 몇 점 숨겨져 있었다. 이를 보자기에 싸서 당시 부산시립박물관 학예사로 근무하던 신경철(현 부산대 박물관장) 선생에게 들고 가 보여준 게 이 유적을 발굴하게 된 계기였다.
하대고분군은 대대리 중대마을에서 저리에 이르는 전 지역이 고분유적이라 할 정도로 대규모로 형성돼 있다. 유적은 백두대간의 지맥인 낙동정맥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해발 150m 정도의 산줄기와 여기서 동쪽으로 뻗은 낮은 구릉지대에 형성돼 있다. 유적의 서쪽 산너머에는 청동기시대의 환호유적으로 유명한 검단리 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하대고분군 일대는 고대사 연구자들이 울산에 존재했다고 하는 우리나라 소국 중 하나인 우시산국(于尸山國)이 위치한 곳으로 비정된다. 우시산국은 지리적으로 신라의 관문에 자리해 있어 부산의 거칠산국(居柒山國)보다 먼저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된 곳으로 연구돼 왔다. 이와 관련, 이재헌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장은 이러한 사실은 묘제나 출토유물에서도 인정이 된다며 '영남지역 목곽묘에 대한 연구' 논문에서 영남지역의 목곽묘는 3세기 후반부터 지역색이 나타나기 시작, 경주와 하대는 동일 지역권으로 묶을 수 있다고 밝혔다.'삼국사기'에 따르면 석탈해왕 때 거도라는 사람이 신라에 합병하였다고 한다. 우시산국에서 시(尸)는 이두에서 'ㄹ'로 많이 표기되는데 '우'와 '시' 를 합치면 '울'이 된다. 따라서 울산은 '울뫼나라' 즉 울산국이 된다는 것이다.
 |
| 최고 지배자의 소유품으로 알려진 청동솥. 이 무덤에서 발굴됐다. |
조영제 선생의 보고 이후 부산대박물관이 이 유적에 대해 수 차례 정밀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삼한시대 후기의 중요한 토광묘 유적으로 파악됐다. 신경철 부산대 박물관장이 이렇게 채집된 토기 자료들을 분석, 1982년 '한국고고학보'에 '부산·경남출토 와질계토기' 주제의 논문을 통해 소개를 하면서 후기와질토기의 지표가 되는 유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이 유적은 삼한시대 후기의 토광묘(목곽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저리의 평지에서는 당시의 주거흔적까지도 발견됐다. 따라서 이 유적은 삼한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당시의 문화는 물론 고대국가의 형성과정과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로 평가됐다.
부산대 박물관은 1차(1991년 11월 25일~1992년 1월 16일)로 대대리 산 155 일대의 130평가량을 조사했다. 여기서 목곽묘와 목관묘 28기와 옹관묘 3기, 기타 3기가 조사됐고, 세발 달린 솥인 동정(銅鼎)을 비롯한 다수의 철기와 토기, 장신구 등이 출토됐다. 중국의 경우 동정은 일반적으로 왕릉 등에서 출토되며 최고 지배자들만이 소장하는 의기성 유물로 알려져 있다. 하대 출토 동정 역시 중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분석됐다.
한편 유적의 전체 성격 파악을 위해 1992년 8월 3일부터 동년 9월 22일까지 1차 발굴 주변지역 190평과, 하대마을 579의 3 일대 35평에 대한 2차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2차 조사에서는 목곽묘 53기, 옹관묘 5기, 청동기시대 주거지 2동, 기타 1기가 발굴됐다.
부산대 박물관 측은 하대가 일찍부터 신라의 통제를 받지만 부산과 김해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중요한 요충지에 해당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하대 '나' 지구 2호에서 부산·김해의 특징적인 고배인 외절구연고배 등이 출토된 점을 볼 때도 그렇게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대 유적 일대에 대해 그 뒤 울산대 박물관과 울산문화재연구원이 조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