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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가야 수장층의 무덤군으로 확인된 경남 함안군 가야읍 말이산 고분군 전경. 아래 사진은 도굴꾼이 15호분을 도굴하고 가면서 남긴 낙서. |
1995년 5월,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이하 창문연) 조사원들이 경남 함안군 가야읍 말이산 고분군 중 15호분을 조사하기 위해 무덤을 덮은 덮개돌(개석)을 들어내다가 이상한 글씨를 보고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덮개돌 옆면에 '부산 3부자 서기 1966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박종익 창문연 학예실장은 이를 두고 "아마도 부산에서 온 아버지와 아들 2명이 도굴을 해가면서 못 등으로 낙서를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간혹 큰 무덤 안에서 도굴꾼들이 남긴 소주병과 과자봉지, 소지품 등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처럼 자신들이 언제 도굴했다는 기록을 남긴 것은 극히 드물다는 이야기이다.
말이산 고분군은 사적 제84호인 도항리 고분군과 사적 제85호인 말산리 고분군을 합쳐 통칭해 일컫는 용어이다. 이는 현재의 함안박물관 뒤 등성이에 두 고분군이 같이 조성돼 있으나 행정구역이 나눠져 있는 바람에 사적으로 따로 지정돼 있는 것이다.
말이산 고분군은 일제 강점기인 1917년 일본 고고학자인 이마니시 류(今西龍)에 의해 처음 발굴됐다. 이후 창문연이 1992년부터 1996년까지 5차에 걸쳐 정식 발굴 조사해 보고서를 5권 냈으며, 경남고고학연구소가 1997년부터 1998년까지 조사를 했다. 그 이전에는 수습 조사 등이 있었다. 1985년에 도항리 14호분 옆에 덮개돌이 노출돼 수습조사가 있었고, 1992년에는 고분군 북쪽 끝과 연장선상에 있는 해동아파트 자리에서 마갑총이 확인되기도 했다. 창문연 학예사로 말이산 고분군 발굴에 참여했던 이주헌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 학예연구관은 "현재의 함안성당 언저리까지 석곽과 유물 등이 나온 적이 있어, 말이산 고분군의 능선이 함안 시가지 쪽으로 이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창문연은 말이산 고분군 발굴 조사에서 삼한시대 목관묘를 비롯, 목곽묘, 수혈식석곽, 횡혈식석실 등 60여 기의 각종 유구와 2000여 점에 달하는 토기와 철기 등의 유물을 발굴했다. 하지만 워낙 도굴이 심해 완형보다는 편들이 많이 나왔다. 즉, 좋은 유물은 도굴꾼들이 다 가져갔다는 말이다. 일각에서는 "말이산 고분군이 아라가야 수장층의 무덤군이라면 아무리 도굴이 심했다지만 금동관 흔적은 있어야 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이에 대해 이주헌 학예관은 "8호분에서 연화문이 찍힌 금동편이 나왔는데, 그 것을 금동관 편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4세기 중엽에서 561년 께 신라에 의해 무력으로 정복당할 때까지 조성된 것으로 확인된 말이산 고분군에는 재미 있는 일이 또 하나 있다. 이마니시 류가 5호분(옛 30호분)을 발굴할 때 덮개돌 8개 중 가장 남쪽 덮개돌 위에 글자가 적혀 있는 게 확인됐다. 당시 이마니시 류는 이 것을 '수하왕(壽下王)'으로 판독했다. 이후 학계에는 안라국의 수장으로서 왕의 존재가 실재했고, 왕명을 사용하는 고대 국가의 일면을 알 수 있는 자료로 널리 활용됐다. 창문연이 이 글자에 대한 정확한 판독을 위해 탁본을 뜨고, 사진촬영을 해 전문가들과 정밀 분석을 한 결과 '수(壽)'자는 '기(奇)'자로, '왕(王)'자는 '삼(三)'자로 확인돼 '기하삼(奇下三)' 또는 '하삼기(下三奇)'로 확연히 드러났다.
이에 대해 박종익 실장은 "근세 이래 덮개돌의 일부가 바깥으로 드러났을 가능성이 높고, 이 5호분이 말산리 본동으로 넘어 다니는 길과 불과 2~ 3m 떨어져 있어 누군가에 의한 낙서일 가능성이 높다"며 "5호분 아래는 지금도 '하삼기동(下三奇洞)' 또는 '아랫삼기'라는 지명이 불리고 있어, 안라국 시기에 조성된 5호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말이산 고분군에서는 수레바퀴 모양의 토기와 새 모양 토기, 마구류, 철기 등 각종 유물과 8·22호분 등에서 순장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