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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김해 구지로고분군. 도로로 변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김해 대성동고분군 인근 실로암 어린이집 앞에 도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데 포클레인으로 유물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경남 김해 대성동고분군을 발굴했던 경성대 박물관팀으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1993년 7월 이었다. 전화를 한 사람은 대성동고분군 발굴 때 같이 참여를 한 적이 있었던 부산대 고고학과 송원영(현 김해시청 문화재 연구원) 학생이었다. 경성대 박물관팀이 현장에 달려가 보니 포클레인으로 무자비하게 땅을 파내는 곳에는 깨진 토기 등이 빽빽했다. 박물관팀은 즉시 공사를 중지시켰다.
이렇게 해서 그해 8월 4일부터 9월 23일까지 51일간 경성대 박물관에 의해 이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이곳은 대성동고분군의 북쪽 구릉 끝부분에서 북동쪽 120m 지점으로, 서쪽의 내외동과 동쪽의 대성동을 연결하는 도로인 구지로 확장공사 지역이었다. 이미 서쪽 무덤의 대부분은 포클레인에 의해 소실됐고, 동쪽 부분의 180여 평 정도만 남아 조사가 이뤄졌다. 동쪽 부분도 이미 윗 부분은 파괴되고, 유물이 일부 드러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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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고분군 중 4호 목곽묘. 단경호가 피장자의 머리 왼쪽에 놓여 있다. |
여기서 목관묘 14, 목곽묘 38, 옹관묘 4, 석곽묘 1기 등 57기의 무덤이 300여 년 동안 좁은 면적에 밀집, 중복 조성돼 있었다. 이 가운데 목관묘는 대성동 2, 3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것과 거의 같은 성격이었으며, 대성동 구릉을 중심으로 서쪽을 제외한 주위 평지에 비교적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목곽묘는 대성동 능선부의 대형 목곽묘와 대조를 이루는 중소형 무덤이 주류를 이루며, 모두 부곽이 없는 단독분이었다. 따라서 구지로고분군은 지배자 층의 무덤인 대성동고분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무덤군이었다. 하지만 박물관 측은 대성동고분군의 유적 범위가 구릉 주변에 한정된다고 그동안 생각했는데, 대성동고분군의 범위를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했다.
이 고분군에서는 12호 목관묘가 가장 주목을 받았다. 여기서는 피장자가 머리에 쓴 철대(장식 없는 관의 형태)와 청동제 팔찌가 발견됐다. 당시 가야인들의 남성 평균 키는 160㎝를 약간 넘었는데, 이 무덤의 주인공은 무려 177㎝나 됐던 것이다.
이 고분군에서는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무덤이 끼리끼리 조성돼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테면 4호 목곽묘와 6호 목곽묘의 경우 머리 왼쪽 부분에 단경호를 매장했는데, 이런 예가 6기나 된다는 점이다.
이 고분군의 가장 큰 특징은 5세기대 무덤이 없다는 것이다. 37호만 4세기 4/4분기의 41호를 파괴하고 조성돼 있어 5세기 대의 무덤으로 생각할 수 있고, 5세기 대로 볼 수 있는 무덤은 하나도 없었다. 이에 대해 김재우 경성대 박물관 학예사는 "조사한 고분군의 면적이 좁다는 단점이 있으나, 5세기대의 무덤이 없다는 것은 400년 고구려군의 공격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김 학예사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군은 금관가야의 중심이었던 대성동지역 일대에 대한 집중 공격을 시도함으로써 금관국의 와해를 노렸다는 것을 상정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고구려군의 공격에 직접 맞서 싸운 집단은 대성동 지역 일대의 기층민이었으며, 이 전쟁에서 사망한 기층민이 많은 탓에 5세기 전엽의 무덤이 적을 수밖에 없다는 추측을 했다.
그러면 고구려군과 싸우다 전사한 사람들은 어찌된 것일까. 김 학예사는 "물론 당시 전사자들을 대성동고분군의 주변 지역 일대에 매장했다고 볼 수도 있으나, 다급했던 전쟁 상황에서 전사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이에 부장하기 위한 토기 등 물품을 생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오히려 전사자들을 집단매장 혹은 간단히 매장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해석했다. 대성동에서 떨어진 김해 칠산리나 예안리고분군, 장유 일대에서는 4세기에서 5세기로 이어지는 무덤이 연속해서 조성된다는 점에서도 구지로고분군 조성이 4세기 말로 끝나는 원인을 그렇게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