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는 언제부터 온전한 가야로 출발했을까. 또 그들의 정치체제 및 사회발전단계는 어떠 했을까. 가야사의 수수께끼는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이 의문은 가야사 해명을 위해 반드시 정리돼야 할 과제다.
국제신문은 ‘가야사 복원 사업’의 하나로 ‘가야사 쟁점 대토론회’를 마련해 ‘가야의 연맹체설’과 ‘가야의 시·공간적 범위’를 깊이있게 추적, 정리하는 기회를 가졌다. 토론회는 지난달 23일 오후 국제신문 6층 회의실에서 3시간 동안 진행됐다. 이를 지상중계한다. <편집자주>
<가야의 연맹체설>
좌장=주보돈(경북대 교수·경북대 박물관장)
토론=백승충(부산대 교수·역사교육) 김세기(경산대 교수·역사지리학) 박천수(경북대 교수·고고인류학) 백승옥(울산대 연구교수)
▲주보돈(좌장)=가야 정치체는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지 못했지만 단일한 연맹체를 이뤘다는 것이 과거 주류적인 견해였습니다. 단일연맹체론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문헌을 바탕으로 나온 견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단일연맹체는 몇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지역연맹체설, 영역국가론 등 대안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우선 연맹체를 부정하는 입장에 섰던 이영식 선생부터 말씀을 해주시죠.
▲이영식=(연맹체 부정론은) 제가 오래전에 제기한 것으로, 가야는 군장사회 또는 도시국가 정도의 정치체들이 분산돼 있었을 뿐 연맹체를 이룬 적은 없었다는 견해였죠. 그동안 단일연맹체에 대해 많은 수정이 가해지고 지역연맹체 등 대안론이 제기됐으나 개인적으로는 처음 생각에 변화가 없습니다. 변한도 12개 소국으로 분립돼 있었으나 이 또한 연맹으로 보지 않습니다.
▲주보돈=그렇게 따지면 우선 왜 마한 진한 변한으로 갈라져 있었는지부터 설명돼야 하지 않을까요. 단일연맹체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힘들 것 같은데.
▲백승충=가야 전역을 하나의 단일연맹체로 포괄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가야는 지역적인 의미와 정치체적인 의미를 모두 띠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문헌 자료로 볼때 단일연맹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봅니다. 오히려 여러 지역별로 연맹체(지역연맹체)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이근우=임나(任那)가 가야 전체를 총칭하는 용어로 쓰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야라는 말은 임나부흥회의(任那復興會議) 때 여러 국가가 모였다는 의미로 통칭되지 않았을까요. 또 저는 가야가 하나의 동질성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단일연맹체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는 거죠.
▲백승옥=기본적으로 단일연맹체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단일연맹체의 경우 너무 백제사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요. 최근에는 단일연맹체론의 문헌적 근거가 되어온 ‘삼국유사’ 오가야조(五加耶條)가 부정되는 상황입니다.
▲주보돈=이 논의는 4세기 임나가 처음 등장했을 시기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이근우=당시 가야는 무엇인가 공동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안됐던 상황, 즉 결속이 필요한 계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의 동질성과 함께 외교 국방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려 한 것으로 보아집니다.
▲백승충=부분적으로 동감합니다.
▲주보돈=관점을 바꿔서 고고학적 측면에서는 과연 가야를 한묶음(단일연맹체)으로 볼 수 있을까요. 어떻습니까.
▲박천수=단일 및 지역연맹체론 모두 장단점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오히려 시기에 따라 변화해나간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또 전기가야는 김해, 후기가야는 고령 중심으로 보는데, 이것의 실체에 대한 연구성과나 접근이 별로 없었다고 봅니다. 또 4세기 금관가야 중심의 단일연맹체론은 정립이 안돼 있습니다. 특히 5세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소가야의 등장입니다. 포상팔국도 이때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가야가 시종일관 지역연맹체였던 것은 아니고 어느 한때 단일연맹체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나 하고 여깁니다.
▲김두철=저는 우선 고고학적 유물의 분포권을 정치권으로 볼수 있느냐 하는데 의문을 갖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관계는 있을 겁니다. 광개토왕 비문에 보면 김해지역이 가야의 중심이었다고 나옵니다. 저의 입장도 단일 및 지역연맹체론은 시기적으로 분석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야는 넓은 네트워크를 이루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지역적으로 중심이 모아진 게 아닌가 하고 분석해 봅니다.
▲김세기=고고학 자료는 일정하게 정치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묘제상으로 볼때 가야는 김해식 목곽묘와 함안 목곽묘, 고령의 수혈식 석실분 등 3개 그룹으로 나눠지는데, 각각 독특한 양상을 보여줍니다. 즉 제각각 발전해나가는 양상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단일연맹체설은 부적절하다고 봅니다. 가야는 묘제 및 장제상 지역연맹체로 봐야 합니다.
▲신경철=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전쟁 고고학 측면에서 4세기 전반부터 갑주와 함께 낙동강 하구에 마구 등이 나타나는데 이를 주목해야 합니다. 이런 경향은 영남의 동남해안 경주~김해 일대에 나타납니다. 또 아라가야의 토기가 영남 전체에 분포하고 있어요. 이런 점들을 볼때 4세기까지는 가야가 김해지역을 정점으로 광역권 단일 정치연맹체가 있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5세기가 되면서 가야의 상당수 지역이 신라영향권으로 들어가면서 가야는 현저하게 약화됐습니다. 따라서 5세기부터는 지역연맹체로 봐야 합니다. 고고학적으로 봐서 지역연맹체를 4세기까지 소급 적용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조영제=정치체가 없는 단계에서 연맹 혹은 연합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연맹체론을 부정합니다. 4세기의 정치체를 상징할 수 있는 것은 찾기 어렵습니다. 지배자급의 무덤도 발견된 것이 없어요. 와질토기 또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즉, 적어도 4세기까지는 가야 정치체를 상징하는 유물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주보돈=그렇게 따지면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안라(함안) 부분과 맞지 않는데요. 아무튼 연맹체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학계에서 개별 지역에 대한 연구를 보다 강화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 정리=구시영기자
제2주제=가야의 시·공간적 범위
▲신경철(좌장)=가야의 연맹체설과 가야의 시·공간적 범위는 별개로 논의할 문제가 아닙니다. 연속선상에서 토론해 봅시다. 가야의 시간적 범위는 매우 어렵습니다. 시점에 대한 논란이 많기 때문입니다.
쟁점은 1~3세기 변한을 가야사에 포함시켜 가야사의 범주에 넣을 것인가, 아니면 1~3세기는 변한의 역사로 보고 가야의 성립을 3세기말~4세기초로 볼 것인가 두가지입니다. 주보돈 선생은 앞의 것을 전기론(前期論), 뒤의 것을 전사론(前史論)으로 명명했지요. 어떻게 보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주보돈=편의상 그렇게 정리해본 것입니다. 기본적으로는 3세기말~4세기초 한반도 북서부의 낙랑·대방군의 변화가 남쪽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시기는 낙랑·대방군이 멸망하고 백제가 마한을, 신라가 진한을 통합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주변 정세의 변화는 변한사회에도 영향을 주었겠지요.
▲이근우=저는 전사론에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 고고학 쪽에서 말하는 것을 보면 삼한과 변한 단계의 소국들이 일치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변한과 가야가 계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느냐, 그 시기가 언제냐 하는 것이 모두 다르게 나타납니다. 따라서 가야 이전의 역사는 따로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두철=삼한이라는 용어의 인정여부부터 논란입니다만, 저는 사회발전단계로 보아 4세기초의 획기(劃期)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지역적으로 김해세력이 다음의 4세기대 발전의 밑거름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인적 교체, 즉 주도세력이 어떻게 바뀌고 있느냐를 주목해야 합니다.
▲백승옥=저는 변한도 가야사라고 봅니다. 굳이 나누자면 전기론이 되겠지요. 어느날 갑자기 가야가 형성됐다고 보지 않기 때문에 삼한 형성기, 즉 변한의 역사부터 가야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삼한 소국과 가야 제국은 연속선상에 있고 삼한 소국의 형성과 성장발전의 결과가 곧 가야제국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이 경우 전체를 잘라서 봐야 하는데, 고구려 신라 백제와 가야가 같이 있었던 시기, 그 이전에 부여 등의 열국들이 있었던 시기를 구분해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신경철=전기론의 경우 ‘국(國)’의 시작을 언제부터 잡느냐가 관건일 것 같습니다. 이영식 선생은 초기의 목관묘를 기준으로 소국/대국으로 구분해 설명하고 있는데, 저는 3세기말 김해/경주가 구분되는 시기를 획기로 봅니다. 그러니까 이때부터 가야전기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논점을 정리하면, 발전된 가야의 시작을 2세기 중후반 또는 목곽묘 출현시기로 보느냐, 3세기말로 보느냐 이거겠군요.
▲조영제=목곽묘 단계가 없는 지역도 있습니다. 따라서 전기/전사로 가르는 것도 실은 무리가 따릅니다. 김해는 예외로 쳐도 삼한 소국단계, 가야 소국단계는 독자적인 기반 위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간 것으로 파악됩니다.
▲이영식=저는 수로왕 등장을 획기로 삼아 이전을 청동기 구간사회, 이후를 토광목곽묘(부장품이 들어감)로 상징되는 초기 철기시대로 나누고 있습니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수로왕 개국연도인 서기 42년을 못믿을 것도 없고요.
▲신경철=그렇다면 서기 42년에 벌써 소국단계에 도달했다?
▲이영식=그럴수도 있죠. 늦은 단계로 본다면.
▲신경철=지석묘에서 목관묘로의 전환은 획기가 분명하지만 계승관계는 아니라고 보는데요. 일본에서도 ‘국’의 출현을 기원전 1세기 후반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올려다 보려고 하면 고고학적인 해명이 어려워집니다. 획기를 잡을 때는 질적 비약의 근거를 찾는게 중요합니다.
▲백승충=가야의 시점 논의는 문헌과 고고학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안전한 것은 삼국의 발전과 대치시키는 것이지만, 가야는 자체 발전요소에다 외부 유입요소가 함께 개입돼 있습니다. 문헌적으로는 최소한 기원후 1세기에 분명한 획기가 있지요. 3세기 후반 등의 획기에 너무 가중치를 두면 안될 것 같습니다.
▲김두철=저는 전사론 쪽인데, 묘제를 중심으로 보면 목곽묘 단계에서는 문화의 주체적 수용이 강합니다. 3세기말~4세기초에 비로소 발전된 가야가 있었다고 봅니다.
▲주보돈=전기/전사의 구분은 예컨대 아기를 잉태했을 때 아기로 보느냐, 태어났을때 아기로 보느냐의 문제와 비슷합니다. 가야사라는 좁은 창으로만 가야를 보지 말고 고대사 전체의 맥락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이성주=구야국(김해)이 가락국으로 전환된 것을 고고학은 아직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석묘나 목관묘의 분포를 가지고 해석하는 데도 무리가 있고요. 저는 2세기 후반을 획기로 보고 있습니다.
▲박천수=4세기 전엽의 획기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5세기초의 국제적 동향, 즉 신경철 선생님이 주장한 김해 금관가야 세력의 일본 긴키지방 이주설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일본쪽의 고고학적 발굴자료를 보면 시기가 부합되지 않거든요. 이 부분은 신중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신경철=절대연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축조중단 시점과 정세변화를 살피면 개연성이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인만큼 다음에 검토할 기회를 갖도록 합시다.
가야의 시점논의는 보시다시피 논자들마다 견해가 크게 엇갈리고 있습니다. 다만 ‘삼국지’에 나오는 ‘국’의 문제는 전기가야의 시작과 관련이 있는듯 하므로 고고학 쪽에서 검토할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추가적인 연구와 발굴이 행해지면 가야사의 최대 쟁점인 시점 문제도 가닥을 잡을 것으로 봅니다.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 정리=박창희기자
[참석자]
△주보돈(경북대 교수·사학) △신경철(부산대 교수·고고학) △김세기(경산대 교수·역사지리학) △백승충(부산대 교수·역사교육) △박천수(경북대 교수·고고인류학) △백승옥(울산대 연구교수) △이영식(인제대 교수·사학) △조영제(경상대 박물관장) △이성주(강릉대 교수·사학) △김두철(부산대 교수·고고학) △이근우(부경대 교수·사학) <무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