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소리
아낙들은 쑥과 냉이를 캐고 있다. 바구니를 끼고 뭉툭칼로 겨울의 끝을 후벼파는 손길이 산뜻하다. 연하게 자란 쑥뿌리가 이른 봄볕을 받아 흙냄새를 피운다. 지난주 부산 기장군 철마면의 들녘 풍경이다.
도시의 외곽에서 봄소식이 속속 타전되고 있다. 남녘의 산사에 홍매화가 붉은 마음을 열었고, 주택가 매화가 부스스 눈을 떴다. 경칩(3월 6일) 무렵이면 해운대와 을숙도에도 봄나물들이 고개를 내밀고 향기를 풍기겠다. 벌써 코가 벌름벌름해진다.
바다도 화신을 받은 모양이다. 색깔이 달라졌다. 블루이시 그린(bluish-green·청록색). 쑥빛과 냉이빛을 버무리면 저런 색이 될까. 시린 햇살을 한껏 빨아들여 거칠게 숨쉬는 바다가 당신을 부르고 있다. 한번 나가보지 않을텐가.
#노장들의 부산이야기
지난 20일 오후 1시 부산 부산진구 양정동 B숯불갈비집. 백발 성성한 ‘노장’들이 한자리에 모여앉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최해군(향토사학자), 윤정규(소설가·전 언론인), 성병오(소설가)씨. 연초 최해군 선생이 펴낸 ‘내사랑 부산바다’(부산시 발간)가 자연스럽게 화제가 됐다.
“이제 내륙은 안돼. 한발도 못가서 밀리는 차들 봐. 바다로 가야 해.”(최해군)
“개항이래 갖은 고통 다 겪으면서도 이만하게 살게 된 것은 바다의 힘 때문이라고 봐야지.”(윤정규)
“뜨내기들이 모여사는 곳이라 예전엔 부산사람들의 고향의식이 약했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요. 젊은 세대들이 커오면서 부산 토박이가 절반을 넘는다지 아마. 젊은이들은 보기와 달리 부산에 산다는 자부심과 애향심이 강해요.”(성병오)
소주 세병이 바닥을 드러냈다. 최해군 선생은 올해 일흔여섯이다. 나이를 잊은 그의 집필력은 젊은이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책 이름에 왜 굳이 ‘내사랑’이란 수식어를 달았을까.
“부산항을 되찾는다는 심정으로 썼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부산은 바다 밖에 없어. 한국이 개척해 나갈 곳도 거기일테고.”(최해군)
#바다의 노래
하니 생각난다. “부산이 뭐꼬. 바다 아이가. 와 바다가 죽는 거 봤더나.”
악동(樂童) 엔터테인먼트 김상국씨는 자신의 신명 원천을 바다의 늘푸른 힘으로 돌렸다. 바다가 없었다면 그는 좌절해 쓰러졌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사람새끼’의 도리와 정을 들먹이며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면서도 그는 바다를 이야기했다.
요산(樂山·김정한)의 눈빛속에도 바닷빛이 머물러 있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애정의 끈을 놓지 않았던 낙동강, 그 1300리 물길이 종래 닿는 곳도 바다다. 사직벌의 부산 아시아드주경기장은 바다 이미지를 본뜬 부산의 콜로세움이다. 부산 갈매기가 노니는 곳, 몰운대의 바람이 갖가지 만남을 주선하는 곳, 민락회촌의 생선회가 잡혀오는 곳, 해운대엘레지가 불리던 곳, 되살아난 온천천이 징검다리 건너 찾아가는 곳이 부산 앞바다, 바로 태평양이다.
#바다 역사의 시작
갯놈, 뱃놈, 갯것. 다소 기분나쁘게 들릴 수도 있는 이 말들은 ‘바닷가 사람들’을 일컫는 속어다. 신라 고려 조선의 모든 내륙이 그렇게 불렀다. 일제는 한술 더 떠 ‘잡것’이라 했다(윤정규씨의 말). 하긴 1960년대까지 바다는 ‘지도밖의 영역’이었다. 갯놈, 갯것들의 활달한 기질과 강인한 생명력은 천시받고 무시됐다. 그게 오늘에야 ‘치명적 인식 오류’라는 것을 알지만, 현대사가 그것을 돌파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돌파의 중심 동력은 부산이었다. 김열규(인제대 국문학과) 교수의 말을 경청해보자.
“부산은 외세(일본)와의 접촉 속에서 성장했어요. 개항 이후 외세와 부대끼면서 자각하고 힘을 키워 삶의 터전을 닦았어요. 근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부산이 중심에 서 있었다는 것도 고통이자 시련이었죠. 달리보면 그게 약이 된 것 같아요. 다양성과 이질성이 혼재하면서도 항구 특유의 인정과 포용이 살아있는 도시가 부산이지요.”
부산은 맨주먹 쥔 떠돌이들이 무에서 유를 일군 도시다. 당대의 부산내기들은 아무곳에나 뿌리내리는 들풀처럼, 새마당(부산역 자리의 옛이름)에 모여들어 희망의 난장(亂場)을 폈다. 그러면서 자유, 자립, 인고라는 삶의 원형질을 만들었다.
동래부(東來府)의 역사를 따로 하면 부산이 한국 제2의 도시가 된 것은 고작 100여년만이다. 이토록 단시간에 급성장한 도시는 세계사에서도 흔하지 않다. 그 원동력은 바다였다. 부산항은 서울과 내륙에 쏠려있던 한국적 삶의 지형을 바깥으로 돌려 놓았다. 김열규 교수는 이를 한국문화의 판각이동이라고 정의했다.
#지도를 거꾸로 놓고
부산은 더 이상 한반도의 끄트머리, 변방이 아니다. 부산사람들은 이제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기 시작했다. 서울이 한국의 중심이라면 부산은 환태평양의 중심이다.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세계 간선(幹線)항로상에 위치한 부산의 지정학적 매력은 갈수록 빛을 발하고 있다. 앞으로 부산은 태평양과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철의 실크로드’ 기·종점이 된다. 글로벌 시대는 부산에 기회를 주고 있다.
국제컨벤션협회 집행위원장 톰 훌튼씨는 부산을 ‘개척정신이 충만한 도시’라고 평했다. 이 말이 빈말이 아닐진대 부산은 젊은 도시다.
젊은 부산은 맨주먹으로 불끈 일어선 부산내기, 그 2~3세들이 가꾸는 도시다. 젊은이들이 부산내기들의 원형질인 자유, 자립, 인고의 가치를 ‘부산다운 매력’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화두는 끝내 바다다. 부산다운 매력의 원천과 동력이 거기 있는 탓이다.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꿈틀대며 용솟음치는 저 바다를 그냥 놔둘 것인가.
부산내기들은 그 바다를 곁에 두고도 그리워한다. 바다에 다시 봄이 왔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