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꽝의 전설
사직벌의 미나리꽝을 아시는지. 쇠미산(152m·일명 금용산) 자락 너른 논배미에 파릇파릇 돋아나던 미나리순. 쇠미산의 맑은 샘물이 기르던 사직벌의 미나리는 한때 동래와 연제, 부산진의 봄맛을 돋우던 채소였다.(사진은 경기장 내부모습)
30년 저편의 일이니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논배미 가득 싱그러움이 퍼지던 그 미나리꽝에 바다기운을 물씬 풍기는 건축물 하나가 우뚝 서 있다. 부산아시아드 주경기장이다. 쇠미산 자락 고갯마루 짬에 사는 김정태(67·연제구 거제2동)옹은 사직벌에 있던 미나리꽝을 어제일처럼 기억한다.
“1만평도 더 됐어. 봄이 되어 미나리를 수확할 때는 온 들판이 펄펄 살았지. 한쪽에는 돼지가 꿀꿀거렸고…. 여기에 주경기장이 섰으니 상전벽해지.”
벽해(碧海). 맞다. 푸른 바다다. 아시아드 주경기장은 사직벌에 들앉은 부산 앞바다다. 반개방형 지붕의 넘실거리는 파도, 아침해가 땅을 딛고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이는 주기둥, 사통팔달 열린 문은 모두 바다 이미지다.
오는 6월이면 이곳에서 월드컵의 열광이 터지고, 9월이면 아시아의 함성이 울려퍼진다. 관객들의 파도타기 위로 ‘부산갈매기’가 날면 희망의 전령 ‘두리아’(부산AG 마스코트)는 ‘영원한 아시아’를 노래할 것이다.
#주제는 부산 앞바다
주경기장의 겉모습은 로마시대 원형투기장인 콜로세움을 연상케한다. 힘과 기로 투지를 겨룬다는 점에서 기능이 유사하다. 하지만 그 역할과 웅지는 아주 다르다.
주경기장의 주기둥은 모두 48개다. 철골 철근 콘크리트로 된 이 주기둥들은 지하 1층 지상 4층 연면적 9만2천6백37㎡(관람석 5만4천석) 규모의 거대한 경기장을 균분된 힘으로 지탱하고 있다. 합심이란 이런 것이다. 주기둥 하나하나는 사람인(人)자 형태로 경기장을 향해 53도 각도로 인사하듯 세워져 있다.
지탱의 중심은 경기장 한가운데 지하 97.3m 지점. 공학이 골치 아프다면 97.3m는 무시해도 된다. 하지만 여기에 주경기장 디지인의 비밀이 숨어 있다고 한다.
“사람 ‘人’자의 오른쪽 자획이 큰 기둥인데, 기울기의 중심점을 잡아 우산의 살처럼 선을 그어 내려가면 지하 97.3m를 만납니다.”(정경호 부산 AG 시설1계장·기술사)
비스듬이 기울어진 48개 주기둥이 제각기 해가 떠오르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은 공학이 찾아낸 97.3m라는 수치 때문. 기둥 안쪽에 관중석을 빈틈없이 들어앉힌다는 계산도 물론 깔려 있다.
토성(土星)이 거기 냅다 앉은 것은 무슨 이유인지. 외계와의 교감인가.
“세계적인 행사에 대비하고 천지의 조화를 이루는 대공간을 구현하기 위해 원형인 경기장 둘레에 토성의 띠처럼 데크를 설치한 겁니다.”(김춘근 부산시 체육시설관리사업소 운영계장)
주기둥의 정교한 곡률(曲率·곡선의 비율)과 토성모양의 데크는 경기장을 온통 곡선미로 출렁거리게 한다.
타원형 지붕의 인장 케이블 구조도 이채롭다. 빛 투과율이 13%인 하얀색의 지붕 막은 주경기장을 세련되고 단아하게 만든다. 이만한 규모에 인장 케이블 구조가 실현된 것은 건설구조공학의 일대 사건이란 평가도 있다.
맨얼굴의 콘크리트도 주목거리다. 경기장 둘레의 데크(인공광장)와 벽체, 기둥, 스탠드를 제외한 모든 바닥은 모두 회색 콘크리트 그대로다. 콘크리트 자체의 잿빛 색감은 강인함과 아울러 의외의 친근감을 준다.
원형 데크를 따라 걷다보면 콘크리트의 무색이 얼마나 힘찬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알 수 있다. ‘人’자형의 기둥 중간쯤에 갖다붙인 데크는 강력한 엔진의 피스톤이 쿵쾅거리며 작동하는 모습이다. 보고 있으면 괜스레 어깨의 근육이 솟는다.
주경기장은 앉음새 또한 ‘양반’이다. 자기 과시가 없다. 백양산-쇠미산의 구릉지대에 있는 듯 없는 듯, 마치 새가 알을 품은듯 주변 지형지세와 잘 어울려 있다.
이 경기장의 만드는데는 총 2천2백69억원이 들어갔다. 설계-시공-완공까지는 8년이 걸렸고 연인원 22만명이 투입됐다. 이 공사로 지난 90년대 후반 전국 최악의 불황에 시달리던 부산의 ‘팔뚝’들은 그나마 밥벌이를 할 수 있었다.
#힘찬 출항, 만선 예감
관중석으로 올라가본다. 1, 2층으로 배열된 스탠드는 색동저고리를 입고 있다. 8가지 색상의 파도 무늬가 시원하다. 본부석 맞은편의 가장 높은 자리. 지상 34m. 아찔한 상승감을 안고 경기장을 내려다보니 속이 다 후련하다.
대형 전광판 옆 시계는 재깍재깍 잘도 가고 있다. 봉화대는 묵상에 잠겨 있다. 높이를 묻자 정경호 계장은 양손을 펴 ‘V’자를 해 보인다. 2002㎝. 불을 당기면 금방이라도 함성이 터져나올 것 같다.
텅빈 경기장. 9레인의 400m 육상트랙이 선명하다. 켄터키 블루 글라스와 페레니얼 리아글라스의 한지형 사철 양잔디가 푸르름을 내뿜고 있다. 물오른 미나리의 색이 저러할까.
우리 조상들은 미나리를 삼덕(三德)이 있는 향채(香菜)라며 즐겨 먹었다. 속세의 진흙탕에서도 때묻지 않고 파랗게 자라는 심지(心志), 응달 양달을 가리지 않고 쑥쑥 크는 강인한 생명력, 가뭄에도 유지되는 신선함이 바로 삼덕이다.
아시아드 주경기장이 가질 덕목도 이것이 아닐 지. 미나리꽝을 걷어내고 앉았으니 이제 제값을 해야 한다.
아시아드 주경기장은 오대양 육대주로 나아가는 부산의 배다. 부산호(號)는 이미 광휘로운 바다로 출항했다. 바다에는 순풍도 있고 풍랑도 있을 것이다. 바다란 어차피 그런 것. 바다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부산 사람들은 반드시 만선으로 귀항하리란 것을 믿고 있다. / 박창희기자
터줏대감 김정태 옹
김정태(67)옹은 아시아드 주경기장의 살아있는 ‘이면사’였다. 그의 집은 주경기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쇠미산 자락. 사직동에서 초읍동으로 넘어가는 확장도로 고개짬, 일명 ‘숯골’에서 김씨는 거의 평생을 살았다.
“조부때부터 터잡고 살았으니 한 150년 됐나. 여기서 일제시대, 해방, 6·25를 다 겪었고 사직벌에 하나둘씩 들어서는 경기장을 다 봤지. 경기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죄다 산이고 농토였어. 군데군데 복숭아밭, 사과밭도 있었지.”
‘옛날 이야기’를 청하자 그는 신이 난듯 돼지와 미나리꽝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다.
“60~70년대 당시 주경기장 일대에는 돼지우리가 엄청나게 많았어. 돼지가 1천마리도 넘었을 걸. 온 동네가 꿀꿀거렸을 정도야. 바로 옆에 넓은 미나리꽝이 있었는데 보통 명물이 아니었어. 물이 좋았기 때문에 미나리도 아주 싱싱했지.”
물론 사직동 일대가 개발되기 전의 일이다. 80년 직전까지 호롱불을 켜고 살았다는 김옹은 통장, 새마을지도자 등을 맡아 동네일을 보기도 했다. 이 마을에는 현재 그가 운영하는 ‘매조집’을 포함해 5곳의 음식점이 있다.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김옹은 “그거 때문에 요즘 수시로 동네 안팎을 치우고 있다”면서 “자기 집 주변은 자기가 알아서 치워야 외국손님들에게 나쁜 인상을 안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