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새벽
의상(義湘)과 원효(元曉)의 마음은 보이지 않고 풍경소리만 그윽하다. 징강 징강…. 속세의 먼지를 털어내는 소리. 범어(梵魚)는 마음 밖에서 추위에 떨고 있다.
새벽 3시. 똑 또옥…. 도량석(道場釋·하루를 여는 첫 예불) 목탁소리가 깊은 밤의 적막을 깨뜨린다. 독송이 흘러나온다. 쿵 쿠궁- 계곡을 감돌아 나오는 장중한 법고소리를 밟고 강강강- 대종(大鐘)이 뒤따라 운다. 종루에 올라선 스님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뒤이어 울려퍼지는 운판과 목어소리. 사물이 다 울렸다. 하늘, 땅, 물속의 모든 중생, 생명있는 모든 것들을 깨우는 소리다. 잔월효성이 눈을 껌뻑거린다.
[금정산성 북문쪽에서 범어사 툇문을 통해 들어오는 범어사 경내의 길은 그윽한 운치와 유현한 풍정을 느끼게 한다.]
새벽 5시. 골짜기 가득 피어오르는 안개를 밟고 사미승들이 마당을 쓴다. 칼바람을 막아주지 못할 것같은 갈색 행자복에 파르라니 깎은 머리가 추워보인다.
오전 6시. 아침공양. 드디어 범어가 속닥거리기 시작한다.
#금정-범어
범어는 금정에서 나왔다. ‘동국여지승람’은 그렇게 전하고 있다.
‘금정산 산마루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그 둘레는 10척, 깊이는 7촌이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고 그 빛은 황금색이다. 세상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梵天)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
금정(金井·금샘)이라는 산 이름과 하늘나라 고기(梵魚)란 뜻의 절은 이렇게 생겼다. 그래서 금정범어다. 최치원의 글과 일연의 삼국유사에도 그런 언급이 있다.
오전 8시. 냉랭한 햇살을 등에 지고 북문을 지나 성큼 오른 고당봉(801.5m). 사통팔달의 조망이 장쾌하다. 태백에서 굽이쳐온 낙동강이 낮게 엎드려 남해로 파고 들고, 금정의 준봉들이 남북으로 말떼가 질주하듯 출렁거린다.
고당봉 동쪽 기슭 풍광명미한 곳에 앉은 금샘은 새파랗게 얼어 있다. 수면에 일렁거리는 구름. 눈을 돌려 의상대와 원효봉쪽을 본다. 앗, 거기에 의상과 원효가!
원효암은 유서깊은 수도도량이다. 그 위쪽 원효봉 정상에는 펀펀한 바위가 있는데, 앉으면 그대로 좌대다. 아래를 보면 거대한 바위군이 용립해 있고 고개를 들면 동해가 보인다. 이곳이 금정 8경의 하나인 의상망해(義湘望海)다. 바윗돌에 새긴 ‘의상대(義湘臺)’란 명문이 또한 작품이다. 우연일까. 의상대에서 서쪽으로 불과 200m 떨어진 자리에 원효가 좌선했다는 ‘원효석대(元曉石臺)’가 엉버티고 있다. 원효암 뒤편 금정산 주능선 지맥의 한 정점이다. 원효석대는 암상금정(岩上金井), 자웅석계(雌雄石鷄)와 더불어 ‘범어 3기(三奇)’로 불린다.
의상과 원효의 금정산 발자취는 1746년(영조 22년)에 정리한 범어사 창건사적에 자세히 나와 있다. 태백산중에 머물던 의상은 대왕의 꿈속 계시를 받들어 금정산으로 간다. 대왕은 왜적떼에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대왕과 의상이 칠일철야를 독경하고 원력으로 동해의 왜적 10만 병선을 토벌했다. 기뻐한 대왕이 절을 짓게 하니 범어사다. 이때가 서기 678년(신라 문무왕 18년). 원효 역시 그 즈음 왜구 5만 병선을 도술로 물리치고 원효암과 미륵암을 창건했다. 알다가도 모를 연기(緣起)지만, 금정산 신화시대는 당대 최고의 배역들이 ‘드라마’를 꾸미고 있다.
#자웅석계-잡아먹힌 암탉
오후 2시. 계명암으로 간다. 가파른 비탈길. 지난 가을 계명추월(鷄鳴秋月)의 현란한 풍광을 자랑했던 산길은 털 것 다 털어내고 무애(無碍)에 빠져 있다. 허리굽혀 낑낑대길 20여분. 일주문을 지나자 조는 듯 앉은 암자가 나타난다. 과연 명당! 산중과 세간이 확연히 구획되고 그 사이에 산중 범어사가 조감도인양 펼쳐진다.
계명봉(642m)은 전설의 곳간이다. 닭울음을 소재로 의상 혹은 어떤 납자가 꾸미는 전설은 ‘계명’이란 이름을 낳았다. 계명암에는 실제로 암탉과 수탉의 모습을 빼닮은 기이한 바위가 있었다. 이것이 자웅석계(雌雄石鷄)다. 그런데 암탉은 누군가 ‘잡아먹고’ 없다. 전설은 왜구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 계명봉 암탉바위는 일본쪽에서 바라보면 그 생김새가 장군의 투구 형상인데, 왜구들이 그 영험을 두려워해 깨뜨려버렸다는 것이다. 고약한 변고다.
진짜 변고는 임진왜란때 있었다. 강토를 짓밟고 쳐들어온 왜구는 범어사를 깡그리 불싸질렀다. 남은 것은 석탑·석등같은 돌덩이 뿐. 폐허는 10년간 계속되었고, 1613년(광해군 5년)에야 겨우 절집이 재건됐다. 짓밟힌 폐허지에 돌덩이를 나르며 범어사를 다시 세우던 조선의 마음이 어떠했을꼬!
계명봉(642m) 꼭대기에는 금정산 유일의 봉수대가 있다. 동서남북 탁 트인 전망으로도 왜구에겐 속수무책이었으니 그 포한이 오죽하랴. 봉수대에 생솔연기를 피워 봉수(烽燧)의 뜻을 물으면 이런 말을 해줄 것같다. ‘다시는 침략당하지 말라’고.
#부도밭의 고승대덕들
범어사는 부산의 후원(後苑)이다. 아무때나 불쑥 찾아도 반가움이 있다. 자연속에 인공을 삼투시켜놓은 선인의 안목은 관찰거리다. 보물인 3층석탑과 대웅전, 유형문화재인 일주문, 당간지주, 석등은 보고 또 보아도 흥취가 다르다.
산문의 어산노송(魚山老松)을 벗삼아 오르다 천왕문에서 보제루로 오르는 돌계단, 그 오른쪽을 보시라. 곧추선 대숲의 기상이 마음을 찌른다.
또하나 놓칠 수 없는 풍정이 금정산성 북문쪽에서 범어사 왼쪽 툇문을 통해 대웅전을 향해 들어오는 길이다. 아실는지, 그 길이 화엄의 풍정이란 사실을. 원응당(승가대학) 용마루의 휘청거리는 포물선과 새까만 기와물결, 용마루 끝의 용머리, 새꼬리는 애틋한 미학이다.
이 사찰의 긍지는 과연 뭘까. “범어사는 수행도량이다. 한국불교를 움직인 많은 큰스님들이 이곳에서 배출됐다. 그래서 기상이 높다.” 범어사 임시 재무국장 정여(正如)스님의 말이다. 스님은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란 의미를 유난히 강조했다.
실제로 의상, 원효, 태고(太古), 묘전(妙全), 서산(西山), 사명(四溟) 등 이름 쟁쟁한 고승대덕들이 범어사를 거쳤다. 범어사가 매년 추모하는 스님만도 654명이다. 이들을 내밀하게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부도밭이다.
일주문 입구에서 왼쪽으로 들어가 고당천 돌밭을 건너면 36기의 부도가 나란히 깨달음의 돌속에 정좌해 있다. 조용히 귀 귀울이면, 의상의 화엄정토(華嚴淨土)와 원효의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가 바람결에 피어날 것 같고, 근세이후 덕을 떨친 용성(龍城), 동산(東山)스님의 묵묵한 말씀이 죽비소리에 실려올 듯하다.
범어사의 고매한 긍지는, 이처럼, 있는 듯 없는, 없는듯 있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지에 들어 있다.
/ 박창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