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품에서는 들풀 향기가 솔솔 풍겼다. 강가 모래밭에 터잡아 길손의 발길에 툭툭 채이면서도 쉽게 꺾이지는 않는 잡초. 길가에 피는 봉선화인지도 모른다.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못다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달래는 꽃.
들풀향기를 품은 그의 목소리는 막힌 가슴을 틔워주는 우렁참이 있고,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는 구성짐이 있고, 슬픔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희망이 배어 있다.
[현철의 '트레이드 마크'인 트로트 박수 장단. 활짝 웃는 그의 웃음속엔 들풀의 향기가 배어있다.]
현철(玄哲). 본명 강상수. 1945년 부산 강서구 대저동 출생. 대기만성의 가수. 트로트의 황제. 들풀처럼 커서 노래해 마침내 ‘들풀의 영광’을 껴안았다.
#앉으나 서나 부산 생각
지난 2일 월드컵 조추첨 축하음악회가 열린 해운대 벡스코. 공연에 앞서 현철을 만나기로 했다. 현철은 약속시간을 5분 넘겨 나타났다. “왜 늦었느냐”는 추궁에 그는 “부산 많이 좋아졌네”라며 동문서답한다. 몰라보게 달라진 벡스코 주변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 늦었다는 너스레다.
현철은 영화 ‘친구’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아마 ‘친구’는 봤겠지. ‘친구’는 단순한 사건이 아닌기라. 여러모로 주눅들고 움츠린 부산사람들의 가슴을 오랜만에 쫙 피게 맹글고, 자신감을 준 쾌거 아이가”라며 진한 부산말로 말했다.
그러면서 현철은 “부산이 보통 도시가”라고 반문하면서, 목소리의 톤을 낮춰 “와 그리 됐는지, 최근엔 많이 움츠렸제. 경제가 추락하면서 비틀대기까지 하고 말이야”하면서 부산의 오늘을 짚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희망이 숨쉬고 있었다. “부산의 힘, 그거 보통 아니데이. 이제 기 좀 펼때도 됐다 아이가”하고 말했다.
#아름다운 아마추어
내년 3월께 현철은 10집 앨범을 낸다. 현철은 ‘청춘’처럼 들떠서 그 소식을 전했다. 준비작업은 이미 착착 진행되고 있다. 아직도 보여주고 싶은 게 남았을까.
“내 음악은 이제부터다. 그동안 사랑을 되로 받았으니 이젠 말에다 노래를 담아 되돌려 줘야지.”
현철의 지인들은 그를 ‘아마추어’라고 부른다. 오랜 무명시절을 보낸 그는 심장병 어린이돕기, 암환자 치료기금 모금 등 자선공연을 많이 했다. 물론 공짜 출연이었다. 최근에는 호텔롯데부산에서 열린 부산AG 기금마련 콘서트에도 무료 출연했다.
90년초 가수왕에 올랐고 여전히 가요계에서 톱가수 대접을 받고 있는 현철의 소박한 면모는 부산지역 사회에서 익히 소문 나 있다. “현철의 노래를 듣고 싶으면 동네 경로잔치를 열면 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현철은 어렵게 경로잔치를 여는 장소라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달려간다. ‘얼마 줍니까’를 먼저 묻지 않고 ‘밴드 안되면 녹음기 가지고 갈까예”하고 되묻는다.
#가시밭길 가요 인생
현철은 나이 서른이 넘도록 무명이었다. 나이 서른이면 연예계에서는 ‘늙은이’로 취급받는다. 그때까지 현철은 14차례나 셋방살이를 전전했고 라면과 풀빵을 먹으며 눈물속에 노래를 불렀다. 그렇지만 가슴속에 품은 악보는 한시도 놓치지 않았다.
중학 3학년때 동네 노래자랑에서 입상한 현철은 동아대 재학시절 그룹활동을 하면서 무대와 인연을 맺었고, 먹고 살기 위해 유랑악극단을 따라다녔다.
첫 음반인 ‘무정한 그대’를 취입한 때가 지난 69년. 하지만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74년 ‘현철과 벌떼들’이란 7인조 그룹을 조직해 본격적인 밤무대 가수로 나섰다. 76년 발표한 ‘다함께 춤을’ 역시 반응이 신통찮았다. 79년 3집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은 반응이 달랐다.
마침내 ‘벌떼들’을 이끌고 서울 입성. 현철은 84년 6월 서울 밤무대에서 이름이 통하는 가수가 됐다. ‘앉으나 서나…’를 발표한지 9년, 첫음반을 낸지 20년만인 88년 그는 마침내 MBC 선정 10대 가수에 올랐다.
#우리도 함 일라보자
‘강바람에 두둥실/ 길을 잃은 저 구름아/ 너는 알리라 내 갈길을/ 나그네 떠나 갈 길을/ 찬란한 젊은 꿈을 피우기위해/ 떠도는 몸이라지만/ 내마음 별과같이/ 저 하늘 별이되어 영원히 빛나리’(내마음 별과 같이).
현철은 자신의 ‘애창 18번’으로 ‘내마음 별과같이’를 꼽았다. 2년전 교통사고를 당해 목을 크게 다쳤을 때, 하늘의 구름과 별처럼 흐르듯이 사는 법을 일러주는 노래의 가사가 고통을 이겨내는데 큰 힘이 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90년대 이후 현철이 낸 앨범은 거의 모두 히트했다. 비결이 뭘까.
“나는 가요계 동향 파악하고 그런 거 안한다. 내 마음 흘러가는 대로 맡겨 둔다. 팬들이 슬프면 슬픈 음악이 되고, 기쁘면 기쁜 음악이 나온다. 내가 추구하는 음악은 고향의 마음이다.”
지난달 중국 북경에서 열린 ‘한중문화 교류행사’에서 그는 10억 인구가 지켜보는 CC-TV에 출연, 사회자의 마이크를 빼앗아 가며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홍보전을 펼쳤다. 부산시가 위촉한 아시아·태평양 장애인경기대회 홍보대사인 그는 실제 아시안게임의 성공을 위해 애쓰고 있다.
지난 98년 현철은 ‘쓰레기 줄이기 공익광고’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부산 아지매들요. 음식은 묵을 만큼만 채려 버리지 맙시데이. 상 다리가 부러지게 차리면, 집사람 허리도 뿌라지고 집안살림이 절딴나는 기라예.” 그의 인생사처럼 소박한 대사다.
“귀를 쫑긋 세워봐라. 얼음밑으로 졸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안들리나. 봐주는 이 없어도 고집스럽게 제 갈길 가제. 그게 부산 고집인기라. 힘겨운 삶의 길이지만 우리도 함(한번) 불뚝 일라보자(일어나보자).”
혼란스럽고 살벌한 이 겨울에 현철은 다시 들풀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 이노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