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으로 느끼는 자유
“사는 기 와이리 되노, 목욕이나 한번 할까”.
세상사에 지친 몸을 추스리는 데 목욕만한 게 없다. 직장서 열받고 주식에 돈 까먹고 밤새 퍼마신 술로 아린 속을 푸는데 이만한 보약이 있을까.
[온천은 세파에 지친 사람들의 심신을 편안하게 하는 명약이다. 부산의 대표적 온천건강휴양지인 허심청 욕탕 전경.]
목욕은 청결, 피로회복, 미용 등 나름의 목적이 있지만, 진짜 목욕꾼은 ‘알몸의 자유’를 즐긴다. 옷을 벗는 순간 ‘자연’으로 돌아간다. 있는 척하거나 없다고 주눅들 필요도 없다. 목욕탕에서는 복잡한 인간관계, 고단한 사회생활의 스트레스가 팍팍 풀린다.
한국의 목욕탕은 외국인들에겐 호기심 천국이다. 대패질하듯 피부를 ‘벗기는’ 때밀이 아저씨. 오이, 진흙까지 들고와 문지르는 아줌마. 갈색빛이 도는 약탕…. 한바탕 ‘알몸 축제’후 재생하는 우리를 그들은 부러워한다.
탕속에 진을 치고 노래 읊는 노인, 주위 기죽이는 ‘코큰 남(男)’, 목에 힘주고 어슬렁거리는 ‘어깨들’, 밤 영업 앞둔 술집여자…. 영화 ‘억수탕’의 군상들은 이렇게 우리들 가까이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미녀들은 온천욕으로 아름다운 피부를 가꿨다. 양귀비는 묵은 술과 서역의 향료를 푼 연화탕 김을 쐬며 황홀경에 빠졌고, 클레오파트라는 온천으로 가꾼 매끄러운 속살로 뭇 사내를 뇌쇄시켰다. 로렌스더렐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다. 온천욕은 동서고금을 두고 삶의 활력소가 돼 왔다.
♨부산은 ‘온천 메카’
부산은 온천도시다. 삼국시대부터 용출된 동래온천은 우리나라 온천의 효시다.
동국여지승람(1481년)에는 신라 왕족과 귀족이 이곳을 즐겨 찾았으며 고려땐 10해(解·1解는 10斗)가 넘는 물이 넘칠만큼 수량이 풍부했다고 전한다. 조선조엔 일본 사람들이 이곳서 목욕 한번 하는 게 소원일만큼 유명했다.
수백년 동안 수맥이 끊기지않은 동래온천은 자연이 부산 사람에게 안겨준 축복이다. ‘온천장’이란 지명이 말하듯, 이곳의 대표상품은 온천이다. ‘부산의 허파’ 금정산을 곁에 두고 있다는 것도 자랑이다.
동래온천에는 학의 다친 다리가 나은 것을 본 노파가 자신의 다리도 담가 효험을 봤다는 백학(白鶴)전설 등 재미난 얘깃거리도 전해온다.
부산엔 동래 말고도 해운대, 다대포, 기장 등 곳곳에 온천이 자리하고 있다. 어디를 파더라도 욕탕이 가능한 온정(溫井)이 있어 부산을 ‘온천 메카’라 부르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시민 휴게실’ 허심청
동래온천은 1900년대 들어 오늘날과 같은 골격을 갖췄지만 이후 개발이 안돼 명성이 날로 쇠락해왔다. 그러다 지난 91년 동래온천은 명물 하나를 세움으로써 재도약의 전기를 맞았다. 동래관광호텔이 지난 91년 도심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전국 최대 규모의 온천휴양시설인 허심청을 개관한 것이다.
[동래구 온천1동 새마을금고 앞에 있는 온정개건비(溫井改建碑). 동래부사 강필리가 1691년 온정을 수리해 개축한 것을 기려 1766년(영조 42년)에 세운 동래온천 기념비다. 비석엔 '건물이 낡고 돌로 된 탕이 막히자 강 부사가 백성들의 건강을 위해 다시 개건했다'고 적혀 있다.]
1천3백평에 남녀 3천명을 동시수용할 수 있는 허심청은 부산대 인근 4개의 공(孔)에서 온천수를 끌어온다.
허심청엔 탕이 38개나 있다. 회목탕, 노천탕, 수면탕, 지압탕, 동굴탕 등 이름을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곽병석 마케팅서비스팀장은 “철따라 나는 과일과 몸에 좋은 약재를 온천수에 섞고 국내 한의사들과 일본 온천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물을 만든다”고 귀띔한다.
하지만 부산 사람들이 허심청을 좋아하는 것은 큰 규모와 수질 때문만은 아니다. 이곳의 열린 구조와 안정감은 매력이다. 열린 유리 천장을 통해 햇살이 내리비치는 자연채광 구조는 자유를 느끼게 하며 욕탕을 바닥 위에 세우지않고 평면을 파내 설치, 편안함을 주고 있다.
허심청에는 또 온천수의 온도가 5~6가지로 다양하다. 일반적인 냉·온·열탕을 다시 세분해 선택폭을 넓혀 ‘뜨거움’ 때문에 일가족이 ‘이산의 아픔’을 겪지 않는다. 새소리 들리는 적당한 온도의 새장탕에서 3대가 함께 목욕하고 물이 얕은 좌탕에서 젖먹이 아이가 노는 모습을 이곳에선 흔히 볼 수 있다.
일본 관광객들과 마산 창원 울산 등지의 아줌마들이 ‘계’를 모아서까지 이곳을 찾는 것은 이같이 훌륭한 인프라 덕분이다.
주말이나 휴일에 허심청에 가면 산 내음이 폴폴 풍긴다. 인근 금정산에서 산행하고 돌아와 온천물에 몸을 담그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탕 주변 여기저기서 등산얘기가 흘러나온다.
“어제 술 뭇더니 고당봉이 와그리 높노”라고 말하자, “어, 시원타”하고 동문서답하는 소금탕속의 50대들. “이따가 꼼장어 묵자” “아이다, 곰탕이 낫다”며 군침도는 실랑이를 벌이는 30대 등산 애호가들. 단풍얘기를 하다 이내 “경기가 와 이렇노. 묵고 살기 팍팍하제”하고 한숨을 내쉬는 60대들. 동래온천은 이들 모두에게 ‘뜨거운 친구’가 되어주고 있다.
부산 사람들은 산에서 정기를 얻고 온천 뒤풀이로 다시 태어난다. 인구 4백만명의 대도시 한복판에 이런 온천장이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이다. 부산 사람들은 ‘동래온천이 좋다’고 드러내고 말하지는 않지만, 이심전심으로 이 ‘뜨거운 맛’을 즐기고 있다.
/ 박재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