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길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에 항구가 있다. 긴 항해의 피곤과 대양을 떠돌던 어수선한 꿈은 이곳 항구에 내려지면서 마침내 위안을 받는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끝없는 도전과 싸움도 여기서 비롯된다.
[불밝힌부산항=부산 남구 신선대 유원지 정상에서 바라본 부산항(북항)의야경.밤낮없이 돌아가는 한국경제의 현장이다.]
지난 98년 IMF 구제금융이 시작되면서 부산항에는 사람으로 넘쳐 났다. 갈곳 없는 실업자들이 배를 타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상당수는 배를 타지 못해 부산역전을 헤매는 노숙자가 되기도 했다. 항구는 더이상 기댈 곳 없는 지치고 힘든 자들이 마지막 희망을 의탁하는 곳이기도 하다. 부산항은 우리에게 그런 항구의 대명사다.
이곳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영욕이 고스란히 녹아 있으며 민초들의 시퍼런 생명이 살아 꿈틀거린다. 식민시대 총독의 수탈의 직접적 현장이며 미군정시대와 한국전쟁 때의 구호품과 군수물자들의 입구이기도 했다. 산업화 시대 수출입품의 상징이었던 합판 원목 원유 신발 섬유 등이 부산항을 통해 들고 났다.
1970년대 이전의 부산항 모습이 우리 삶을 어루만져 주던 선창가 유행가 곡조와 맞닿아 있다면 그 이후의 모습은 선진국 진입을 위해 발버둥치는 한국경제의 격렬한 리듬과 연결돼 있다.
거친 파도를 헤치고 배가 들어오면 항구는 부산해진다. 짐을 내리며 싣고 다음 항해에 필요한 연료공급과 선원들의 생활 필수품 구입이 이뤄진다. 풍랑을 만나 부서진 선체도 수리된다.
부산항에 밤은 없다. 배가 들어오면 바로 하역과 선적 작업이 시작되고 분주한 입출항이 쉼 없이 되풀이 된다. 자성대부두 신선대부두 우암부두 감만부두 등 컨테이너 전용터미널은 24시간 대낮처럼 돌아간다.
지난 91년부터 신선대 부두에서 갠트리 크레인 기사로 일하고 있는 이강석(42·부산 금정구 부곡3동 )씨. 그는 수출입 화물이 육지에서 선상으로, 선상에서 육지로 이동하는 마지막 경계점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그는 주간 근무 때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9시간, 야간 근무 때는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하루 13시간 근무한다.
그가 34곒 높이의 갠트리 크레인 운전석에 앉아 하루에 처리하는 컨테이너는 주간 근무 때는 120여개, 야간 근무 때는 200여개에 이른다. 그의 연봉은 4천만원 정도.
“밤을 새워 컨테이너 선적 작업을 하고 동쪽 바다로 떠오르는 해를 볼 때의 기분은 참 특이합니다. 육체적인 피로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지만 다른 노동자들은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성취감이 있습니다.”
[부산 서구 천마산에서 굽어본 부산항전경.]
휴전선을 지키는 병사처럼 자신이 수출의 전선에 서 있는 전사라는 생각이 가끔씩 든다는 그는 자신이 한달에 일하는 작업량을 계산해보면 한국 경제가 잘 돌아가는지 삐걱거리고 있는지를 바로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한적한 어항에서 출발한 부산항은 이제 세계의 거대 항만들과 어깨를 겨루고 치열한 생존싸움을 하는 동북아시아의 중심항만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바야흐로 항만 자체가 하나의 독립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부산항은 지난해 수출입 화물의 40%, 컨테이너 화물의 85%, 환적화물의 99%를 처리했다. 또 부산지역경제 부가가치의 40%, 고용의 27%, 소득의 23%를 창출했다.
부산 중구 중앙동에서 선용품업체를 운영하면서 물류촉진연구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는 주택곤(57·부산 해운대구 좌동)씨. 그는 부산항만 잘 활용하면 우리나라 전체를 먹여살릴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다.
“1만곘짜리 배가 한척 부산항에 들어오면 최하 1천만원에서 최고 3억원 가량의 달러를 떨어뜨리고 갑니다. 또 1만곘가량의 배가 부산항에 들어와 수리를 하는 경우 1억~5억원이 부산에 떨어집니다. 항만산업의 부가가치는 항만에서 일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부산항에는 아직도 규제가 너무 많습니다. 부산항을 사람과 돈이 모이는 명실상부한 국제도시로 육성하기 위한 정부의 전향적 자세가 필요합니다.”
항만은 경제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는 그는 부산항의 발전없이는 한국경제의 재도약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분단 이후 남한은 대륙으로의 길이 차단된 섬이 됐다. 그러나 남북한의 화해 무드는 대륙의 길을 열고 있다. 경의선이 복원되면 한반도와 유라시아의 연결이 이뤄진다. 한반도 종단철도(TKR), 중국횡단철도(TCR), 만주횡단철도(TMR), 시베리아횡단철도(TSR)가 이어지면 부산항은 대륙과 해양을 잇는 기종점 역할을 하게 된다.
부산에서 로테르담까지 육로는 1만3백70㎞, 해로는 2만㎞가 넘는다. 육로는 해로보다 운송기간이 4~5일 적게 소요되고 운임도 해로보다 20% 정도 저렴하다.
부산항은 21세기 세계 경제의 주인 자리를 노리는 중국과 20세기 아시아 경제 주역인 일본의 사이에 있다. 이는 부산항이 엄청난 물동량의 소용돌이 중간에 놓여 있음을 말한다.
항만을 아는 많은 사람들은 한국경제의 해법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양과 대륙을 연결하는 중간점에서 창출하는 부가가치가 한국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항구가 지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마지막 위안처인 것처럼 부산항은 이제 한국경제의 마지막 희망의 빛이다. / 박상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