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다. 부스스 눈뜨는 청량한 가을바다. 가물거리는 수평선 저편 바다의 끝이 불그레 달아오른다. 부산의 바다 가운데 조망이 가장 좋은 이기대(二妓臺·남구 용호동) 도시자연공원. 해발 225M 장산봉 아래 갯바위들의 뺨이 시퍼렇다.
[사진설명-부산 앞바다를 종횡무진 나는 부산갈매기떼 . 일상에 찌든 시민들에게 갈매기는 자유와 희망을 일깨운다]
꽈아오, 꽉, 꽈아오-. 갈매기떼다. 바다새들이 포말속을 파고들며 아침식사에 바쁘다. 하얀 물비늘을 튀기는 포말속에도 갈매기들에겐 일용할 양식이 있나 보다. 이리저리 날며, 서로 다투면서, 바람처럼 몸을 던져 먹이감을 낚는 난생(卵生)의 족속들.
장산봉 갯바위 주변의 한바탕 소란과 수다가 잦아들면, 장산봉 뒤편에 웅크린 도시는 이윽고 눈을 털고 하루를 시작한다. 이때쯤이면 갈매기들도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대포나 자갈치, 민락동 회센터 옆 선착장으로 몰려간다.
부산갈매기들이 돌아왔다. 갈매기들의 제 1진은 지난주말께 시베리아의 바이칼호에서 번식을 마치고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왔고, 제 2진은 아마도 이번 주초에 중앙아시아나 러시아의 극동 캄차카 반도에서 부산으로 내려왔다. 이 새들은 붉은부리갈매기거나 큰재갈매기다. 지친 표정이나 낯선 기색도 없다. 비행근육을 작동시키는 앞가슴 용골돌기는 대륙을 건너면서 단련돼 더욱 강력해져 있다. 소리소문없이 부산에 당도한 갈매기들은 이제 부산의 타임 스케줄에 따라 먹고 자고 놀 것이다.
지난 2일 프로야구 롯데와 한화가 맞붙은 사직구장. 1만6천여명의 야구팬이 찾은 야구장은 1회초부터 ‘부산갈매기’가 터져나왔다. 지지부진한 여름을 끌고온 롯데가 시즌 막판에 힘을 내자, 야구장 분위기가 달라졌다. 수입 갈매기 호세의 짜릿한 홈런 한방. 야구장은 “호세!” 연호와 함께 귀를 찢을 듯한 ‘부산갈매기’ 합창이 울려퍼졌다. 과연 구도(球都)! 롯데 응원단장 성민재(25·동아대 국문과3)씨는 “응원소리가 너무 커 귀가 멍멍했다”며 “응원 목소리는 아직도 부산이 최고”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지난 90년초 가수 문성재가 ‘부산갈매기’를 발표한 직후, 이 노래는 바로 사직구장의 테마 응원가로 자리를 굳혔다. 대전구장의 ‘대전블루스’나 광주구장의 ‘목포의 눈물’은 리듬감이나 일체감 조성에서 사실 ‘부산갈매기’와 잽이 안된다.
[사진설명-'부산갈매기'를 힘차게 합창하는 사직구장의 '부산갈매기들']
지난 16일 개장한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에도 ’부산갈매기떼’가 나타났다. 이날 개장기념 경기인 한국-나이지리아 축구전에서 부산시민들은 ’붉은 악마’들과 어울려 ’부산갈매기’를 합창하며 파도타기까지 했다.
이 즈음이면, 텃새인 괭이갈매기들의 해변 군무가 한층 아름다워진다. 한반도 연안 외딴섬에서 5~8월 번식기를 끝낸 괭이갈매기들은 가을빛을 좇아 해운대 광안리 몰운대 등지로 놀러 나온다. 낙동강 하구 모래톱에서 여름을 난 쇠제비갈매기 무리가 얼마전 훌쩍 떠난 후 적적하던 기분이 북방에서 날아온 동족(同族)을 만나 생기를 되찾고 있다.
부산은 갈매기의 도시다. 부산시의 시조(市鳥), 2002 부산아시안게임의 마스코트가 갈매기다. 부산을 배경으로 한 노래에는 으레 갈매기가 끼어든다. 야구장과 축구장의 ‘갈매기떼’는 부산에서만 볼 수 있는 일상 풍경이다. 갈매기에 대한 부산사람들의 정은 확실히 다르다.
중구 중앙동 연안여객터미널은 갈매기가 아이디어를 준 건축물이다. 건물 귀퉁이 부분의 곡면 천창(天窓)은 영판 갈매기 날갯짓의 모습이다. 갈매기들이 이곳을 마다할 리 없다. 바닷길로 부산을 찾는 외지인들에게 갈매기들은 가장 먼저 달려나가 인사를 한다.
갈매기는 어민들에게 ‘병주고 약주는’ 새다. 어창이나 선창 주변에서 잡아둔 고기를 낚아채려 껄떡대는 것들이 갈매기이고, 한바다에서 뱃전을 배회하며 물고기가 있는 곳을 기막히게 짚어주는 안내자가 또한 갈매기다.
‘부산갈매기’라는 말은, 최소한 부산에서는 사회·문화적 개념으로 통한다. 1차적으로 부산에 날아오는 모든 갈매기는 부산갈매기로 불린다. 목·과·속 따위의 분류나 텃새(괭이갈매기), 겨울철새(붉은부리갈매기, 재갈매기) 여름철새(쇠제비갈매기) 나그네새(제비갈매기)식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야구장에서는 선수와 야구팬이 모두 부산갈매기다. 용병 야구선수들은 수입 갈매기다. 간혹 ‘부산친구’ ‘부산의 별난 사람’이란 의미로 부산갈매기가 쓰이는 경우도 있다.
부산갈매기는 얼마나 될까. 조류전문가들은 텃새인 괭이갈매기가 대략 2천~3천마리, 철새인 갈매기가 5천~6천마리 될 것으로 본다.
경성대 조류관 이종남 연구원은 “갈매기는 인간친화적이어서 사람이 대하기에 따라 그 수가 달라진다. 겨울철 부산권에 오는 갈매기는 붉은부리갈매기가 많다”고 말한다.
갈매기는 수더분한 모습과는 달리 눈이 밝다. 하늘에서 바닷속의 멸치를 낚아올리는 눈이다. 거기다 멀리, 깊이 본다. 갈매기는 또 비행의 명수다. 바다에서 쾌속질주, 수직하강, 저속활공, 동체착륙하는 모습은 어떠한 정교한 비행체도 흉내낼 수 없다.
갈매기가 인간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비상(飛翔)의 자유와 꿈꾸는 자의 희망이다. 부산항에서, 낙동강 하구에서, 날것이 푸덕거리는 선착장에서 자유롭게 나는 갈매기의 꿈이 부산의 꿈과 무엇이 다르랴. 부산갈매기는 ‘더 높이, 더 자유롭게, 더 아름답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현실 위를 날고 있다. / 박창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