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목소리, 표정, 몸짓은 항구의 신명이다.
닫힌 마음을 열게 하고, 막힌 가슴을 탁 뚫어주는 목소리.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유자재로 구사되는 재담과 익살. 지칠 줄 모르는 활동력….
김상국(金相國)씨. 올해 나이 68세. 거의 완벽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가수이자 배우, 코미디언. 만능 엔터테이너. 혹자는 그를 ‘악동(惡童)’이라 일컫지만, 그건 김씨를 웃기는 말이다. 그는 ‘악동(樂童)’이다.
그의 사전에 노년이니 황혼이니 정년이니 하는 말은 없다. 오직 움직임과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을 뿐이다. 사람의 몸과 정신이 저토록 단단할 수 있을까 싶다.
김씨는 부산사람이다. 1934년 부산 동구 범일동 출생-부산대 상과 졸업-서울서 가수·연예활동 40년-1994년 귀향, 부산정착. 그의 이력속에는 부산이 꿈틀거린다.
지난 7일 부산시청 광장에서 열린 PSB ‘유랑극단’ 녹화장. 김상국씨가 신나게 ‘쾌지나 칭칭’을 부르며 한마당 흥을 돋우자 관객 모두가 일어서서 그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왁자한 그의 목청은 관객들의 가슴을 활짝 열어젖힌다. 김씨는 “쾌지나 칭칭은 하루종일 가사를 바꿔서도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새해벽두 국제신문 주최로 금정산에서 열린 해맞이 행사에서 그는 강태이(63·부산 동래구 온천1동)씨가 개사한 240구절의 ‘쾌지나 칭칭’을 쉬지 않고 불러 제쳤다. ‘적조 적조야 물러가라/ 우리 어민 다 죽는다/ …우리 모두 힘을 모아 부산경제 일바켜 보세/ 쾌지나 칭칭나네…’
김상국씨는 지난 62년 루이 암스트롱 창법을 흉내낸 ‘불나비’와 ‘쥐구멍에도 해뜰 날 있다’라는 노래로 음반 13만장 판매고라는 공전의 히트를 치며 연예계에 등장했다. 58년 부산 중구 중앙동 국제극장에서 하루 2천원을 받고 공연했던 그가 4년만에 하루 3만6천원(당시 최고급 양복 1만2천원)을 받는 대형 스타가 된 것이다. 소설가이자 문화평론가인 신태범씨는 “당시 13만장은 요즘 3백만장에 버금간다”며 “김상국씨의 당시 인기는 80년대 조용필에 비견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래가 히트하자 영화출연 제의도 잇따랐다. 신성일-엄앵란 부부와 공동주연을 맡은 ‘불량소녀의 장미’부터 ‘팔도 사나이’ ‘육군 김일병’ ‘벌거숭이’ 등 30편의 영화에서 그는 특유의 ‘끼’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의 활화산같은 열정은 일종의 미스터리다. 고희(70세)를 코앞에 둔 그가 아직도 젊은이 못지않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철저한 프로근성, 서민적인 성정, 낙천적인 기질에 기인하는 것 같다.
지난 10일 PSB 라디오 방송 스튜디오. 인터뷰를 위해 찾은 기자에게 그는 대뜸 “니 담배없나”하며 담배를 뺏어물고는, “(담배 피는 모습이)멋있나. 인생은 멋있게 살아야 하능기라”라며 능청을 떨었다. 곱슬한 흰머리에 10대에나 어울릴법한 가방을 메고 이어폰까지 꽂은 그는 영락없는 ‘청춘’이었다. 그는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스스럼없고 당당하다.
쇳소리를 섞어 걸찍하게 늘어놓는 경상도(부산) 사투리는 그의 진면목이다.
80년대 후반 그는 ‘니 구쿤께 내 구쿠지. 니 안 구쿠마 내 머라쿠나’라는 억센 서부경남 사투리로 전국 사투리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7년전 그는 가수가 아닌 ‘환자’로 서울에서 귀향했다. 부인이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전 재산을 날린 뒤였다. 난생처음 ‘팬’이 아닌 빚쟁이들에게 쫓겨다녀야 했다. 불청객처럼 심장병, 고혈압, 당뇨병이 또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광안리의 바다와 기장의 힘찬 파도소리는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짠 소금 냄새를 맡으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안들겄나. 바다가 내게 희망을 준기라.”
‘얼마나 사모치는 그리움이냐/ 밤마다 불을 찾아 헤매는 사연/ 차라리 재가 되어 숨진다 해도/ 아 너를 안고 가련다 불나비 사랑(‘불나비’ 김강섭 작사·곡)’.
김씨는 그의 대표곡 ‘불나비’처럼 뜨겁게 일어섰고 다시 노래를 불렀다. 요즘도 그는 라디오 프로그램 2개와 TV 1곳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서울의 공중파 방송에서 그를 필요로 할때도 바로 달려간다.
그는 제2의 노래인생을 계획하고 있다. 고희에 맞춰 200여명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뒤에 세우고 진짜 쇼무대를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다. 하루일을 끝내고 집에 가면, 트럼펫이나 색소폰을 불고 피아노를 치며 거의 매일 5시간 이상 맹연습한다.
“내가 피아노는 몰랐다 아이가. 늦게 배웠는데 그것 참 재미있데. 4개월만에 체르니 30번 안 치나. 와 안믿기나. 집에 가 보여주까….”
그에겐 음악 외적인 인간적인 소망도 있었다.
“사업 실패하기 전 고엽자 환자 미망인들을 도왔는데 돈이 없어 그만 뒀다 아이가. 홍시 하나라도 나눠 물 줄 알아야 사람 새낀데….” 김씨는 말을 잇지 못하고 느닷없이 눈시울을 붉힌다.
그는 부산의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좋다고 했다. “부산이 머꼬. 바다 아이가. 바다가 죽는 거 봤나. 인생은 역전인기라. 힘들어도 역전을 할라카믄 고향의 바다처럼 믿음이 있어야제. 내 신명은 아마 시련을 웃어 넘기는 여유일끼다.”
썰물때도 밀물때도 바다는 항상 그를 기다렸고 포근히 껴안았다. 배신은 없었다. 그에게 있어 바다는 활동력의 원천이었다. 그의 강철같은 얼굴 위로 모진 풍상에도 찡그리지 않고 살아가는 자갈치 아지매와 작금 최악의 실업난에도 좌절하지 않으려는 부산사람들의 얼굴이 오버랩됐다. / 이노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