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마치 바다 위 흩어진 섬들처럼 내 머리 속을 떠다닌다…’.
영화 ‘친구’ 서두에 흐르는 내레이션이다. 꾸밈없는 투박한 음성.
[사진설명-부산 동구 범일동의 '친구의 거리' . 영화 '친구'는 숨어있던 부산적인 가치를 깊이 생각해보게 했다]
지난 봄, 이 영화가 개봉될 때만 해도 관객들은 그저 ‘촌스러운’ 영화 정도로 지레 짐작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딴판. ‘친구’는 극장관객 8백20만명(8월말 현재)을 동원, 한국영화의 거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부산의 ‘기념비적’ 문화가 됐다.
이끼가 핀 듯한 영화속의 빛바랜 색조와 투박한 억양의 잔영이 아직도 선연한 것은, 이 영화가 피워올린 부산적인, 너무나 부산적인 요소 때문이다.
영화 ‘친구’ 속의 ‘표준말’은 지독한 수준의 부산 사투리다. 결과적인 이야기지만, 이 영화의 으뜸 매력은 ‘진한’ 부산 사투리다. 달리 말하면 ‘친구’는 부산적인 가치를 업고 성공한 영화라 할 수 있다.
‘친구’의 또하나 미덕은 부산을 포함해 모든 지방사람들에게 지방의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든 데 있다. ‘서울공화국’에 가려져 있던 지방적인 것들을 울컥거리게 하면서, 속절없이 제껴두었던 ‘내 사는 고향’의 자리를 되돌아보게 한 것이다.
‘친구’가 연출한 부산말은 진짜 부산 사투리에 상당히 근접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영화 클라이막스의 ‘마이 무따 아이가…’ 같은 말은 부산사람들 조차 잊고 있었던 생짜 부산 사투리다. 놀라운 것은 유오성 장동건 등 주역들 대부분이 부산과는 연고가 없는 배우들이란 사실. 이들의 부산 사투리는 연기였다.
이들의 연기가 돋보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부산사람들이 하는 부산말에 비교할 수는 없다. 부산 사투리는 부산사람들이 해야 제격이고 제맛이기 때문이다.
‘친구’를 통해 입소문이 났듯, 부산말은 좀 시끄럽다. 일상대화를 듣고 싸움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외지인도 있다. 그러나 그건 남의 속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싸우는 것 같지만 실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좋아서 그러는 것이다. 어찌보면 약지 못해 손해보고, 손해보면서도 약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부산사람이다.
부산 사투리의 기원이나 특성에 대한 연구성과는 아직 미미하다.
부산대 국문과 김봉모(방언론) 교수는 “부산 사투리는 원래 순한 말이었는데, 6·25때 평안·함경도 사투리가 흘러들면서 다소 거친 말로 변했다. ‘어’와 ‘으’의 발음구분이 잘 안되고, 일본말의 영향을 받아 된소리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고 분석했다.
작가이자 향토사학자인 최해군씨는 “부산사람들은 기질적으로 활달하면서 거친 면이 있다. 외부환경의 영향 탓이다. 거친 활달성은 ‘욱’하고 터뜨리는 기질로 이어져 저항정신을 배태한 바탕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사진설명-부산 중구 남포동 자갈치시장에서 생선을 팔고 있는 부산 사람들 . 파닥거리는 몸짓으로 자갈치 아지매들이 내지르는 부산말은 언제들어도 정겹고 싱그럽다]
부산 사투리에 신중성과 실용성이 깃들어 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경성대 철학과 배학수 교수는 “부산말의 투박한 단조로움은 자신의 심경을 잘 드러내지 않는 부산사람의 신중성일 것 같다. ‘만다꼬’(뭘 그렇게 해)처럼 어휘를 최대한 줄이는 실용성도 하나의 특징이다. 신중성은 때로 외지인들에게 무뚝뚝함으로 비치고, 실용성은 원칙과 절차를 소홀히 하는 조급성으로 오해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부산 사투리의 표정은 ‘내유외강(內柔外剛)’이다. 6·25때 부산으로 피란 온 전라도, 충청도쪽 사람들은 ‘이리 오소’ ’저리 가소’ ‘와카는교’라는 말에 혀를 찼다고 한다. 푸대접하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지인들이 부산 내려와 정말 푸대접 받았다는 이야기는 아직 없다.
부산 사투리의 정조는 곰삭은 애환이다. 피란시절에 유행한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보슬비가 소리도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그래도 잊지못할 판잣집이여/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우네…’)과 박재홍의 ‘경상도 아가씨’(피난살이 처량스레 동정하는 판잣집에/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러워 우는구나…’)에는 그런 정조가 짙게 녹아 있다.
아가씨의 부산말은 ‘가시나’다. 중세 한국어의 ‘갓’ 또는 ‘가시’에서 파생된 ‘가시나’라는 말은 약간 속된 울림에도 불구하고, 아가씨나 계집애라는 서울말이 품지 못하는 싱그러운 풋기운이 배어 있다.
부산 사투리의 맛을 뚝배기에 담긴 장맛으로 비유하는 이도 있다. 뚝배기의 장맛은 겉으로 투박하지만 우러나는 맛은 깊다.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는 부산 자갈치 축제의 캐치프레이즈다. 이 말에는 부산사람 특유의 끌어들이기 심산과 장삿속이 엿보인다. 이걸 ‘오십시오, 보십시오, 사십시오’라고 할 수는 없다. ‘~시오’형에서는 지역성이나 삶의 역동성을 발견할 수 없다. 파닥거리는 고기를 파는 억척 자갈치 아지매들은 ‘~하소’형으로 땡고함을 질러야 마땅하다.
이것이 바로 부산이고, 부산 사투리다. 가식이나 치장은 필요하지 않다. 부산 사투리의 말 무늬에는 부산의 정신이 아로새겨져 있다. 부산의 정신을 얼이라고 한다면, 얼을 살려야 한다는 것은 당연지사. 말이 죽으면 얼이 죽는다. ‘얼빠진’ 인간은 스스로를 존중하지도, 남에게 존중받지도 못한다. 부산사람이 부산말, 부산 사투리를 쓰는 것은, 그래서 부산의 가치를 살리는 일이 된다.
‘언어는 존재의 거푸집’이라는 하이데거의 철학적 수사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말이 얼이고 생활 그 자체라는 것은, 저기 땡고함 내지르며 파닥거리는 몸짓으로 살아가는 자갈치 아지매들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박창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