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1년 중 제일 슬픈 달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움츠리고, 겨울준비를 위해 두려움으로 지내야 하는 달이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 매달 열리는 작가들의 개인전이나 단체전, 또는 여러 가지 문화행사나 축제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미술인들과의 교류뿐만이 아니라, 여러 장르의 예술인들과의 만남이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그래서 계절이나 달(月)에 대한 특이한 심리현상에 공감한다. 미술을 비롯, 모든 예술 부문이 다 그럴 것이다. 행사를 어느 달, 어느 날에 연다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경제적인 문제와도 맞물려 때로 커다란 파장을 가져오기도 한다. 평균적으로 작가들은 여름이나 겨울전시를 피하는 편이다. 이 때에는 관람객의 동원이나 관람자 수가 실제로 많은 차이가 난다. 그래서 최근 여름철에 여행을 겸한 해외 전시가 불티난다. 그러나 정작 도심지의 전시장은 텅 비어 있다. 이른바 비수기로 이 때에는 화랑 대관료도 싸게 해 준다.

겨울은 연말연시에 즈음하여 모두가 바쁜 때라 화랑은 또 다시 텅 빈 공간이기 일쑤다. 하루에 단 한 명의 관람객도 전시장을 찾지 않을 때도 있다. 추운 날씨 탓과 한해가 바뀌는 계절의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실제 나 자신도 여름과 겨울에 개인전을 열어 보았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비교적 작가들은 4월에서 6월까지, 또는 9월에서 11월까지 6개월 정도의 시간에 몰려 전시를 한다. 날씨도 좋고 나들이 하기도 용이해 많은 사람들이 문화행사에 참여한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에는 거의 모든 화랑과 공연장에서 전시와 연주회가 열린다. 부산문화회관에서는 음악회가, 각 구의 문화회관에서도 연주회나 연극제 같은 행사가 이어진다. 이 때는 각 지역에서 이어지는 행사 때문에 정신이 없을 정도이다. 대학의 축제들도 거의 대부분 이 시기에 열리게 된다.

그런데 부산만의 특이한 문화현상은 10월에 나타난다. 부산국제영화제 때문에 다른 문화행사들은 된서리를 만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기간에는 전시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 부문들도 마찬가지로 피하게 된다. 장르가 다른데 왜 그런가 싶어도 실제로 이런 기현상이 10월만 되면 부산에서 분명 나타난다. 거의 모든 신문이나 방송 뉴스는 영화제 소식 일색이다. 부산시민으로서 이해는 한다. 그러나 나머지 예술들은 무엇인가. 인기 배우가 전면을 도배해도 미술전시가 비중있게 다뤄진 적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 참신하고 좋은 기획전이 있어도 언제나 둘둘 말아 한 쪽 면에 담아 버린다. 영화제를 제외한 10월의 부산 문화계는 마치 황량한 사막과도 같다. 가장 좋은 달을 영화제에 다 뺏겨 버린 것이다. 그래서 부산 작가들의 관람객 동원이라는 전시성과는 불과 5개월에 불과하다. 다시 11월이다. 심각하다. 전시 안내장이나 도록이 연일 쌓이고 있다. 같은 날에 동시에 개최되는 전시만 해도 서너군데가 되는 날도 있다.

물론 좋은 날에 전시하고픈 작가들의 순수한 바람이야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비수기의 텅 빈 화랑과, 어느 전시장에 가서 축하를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몰린 올 11월을 골고루 분산을 하고 싶다. 그래서 비수기란 말이 없는 부산 화랑가, 부산 화단이 되었으면 한다.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화랑이 관람객으로 붐비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달을 고르지 않고, 관람객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어느 달이든 상관없는 전시가 계속 되길 기대해 본다. 비록 그것이 꿈이라 해도 꾸지 않는 것 보다야 훨씬 나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