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朝暮遙看澒洞嵐·조모요간홍동람
봉연 남쪽의 태화산은 푸르고도 푸른데(蒼然太華鳳淵南·창연태화봉연남)/ 아침저녁 멀리 바라보니 산안개가 자욱하네.(朝暮遙看澒洞嵐·조모요간홍동람)/ 들으니 충희의 비석은 이미 부러졌다 하고(聽說沖曦碑已折·청설충희비이절)/ 불법 밝힌 한 가람만 천 년을 남았네.(千年興敎一伽藍·천년흥교일가람)
위 시는 명재(明齋) 윤증(1629~1724)의 ‘동각(東閣)에서 즉사(卽事)를 읊다. 삼가 중부(仲父)의 시에 차운한 것이다.’(東閣卽事. 奉次仲父韻) 3수 중 둘째 수로, ‘명재유고(明齋遺稿)’권 2에 들어 있다. ‘위 시는 남쪽의 태화산을 읊었다(右南太華山)’고 적혀 있다.
윤증의 중부(仲父)는 윤문거(尹文擧·1606~1672)로, 1633년 식년문과에 급제해 예조좌랑·제천현감·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위 시는 윤문거가 제천현감으로 근무 중일 때 윤증이 그곳에 갔다가 읊은 것으로 추정된다. 3행의 충희는 고려 인종(仁宗)의 아들로 출가해 승려가 된 인물이다. 태화산에 최선(崔詵)이 지은 충희비가 있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46 영월군’ 편에 들어있다.
3, 4행은 사람의 자취와 기념물은 세월 속에 훼손되었어도 불법과 사찰의 정신은 오랜 세월 남아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앞의 태화산과 산안개가 천년 세월의 아득함을 자연스럽게 받쳐 주고 있다.
위 시를 지은 윤증은 윤선거(尹宣擧)의 아들로 성혼(成渾)의 외증손이기도 하다. 그는 효종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나 조정에 천거되기 시작해 좌참찬·우의정·판돈영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묘지명을 계기로 스승인 송시열과 사제간의 의리가 끊어졌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릴 때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사흘간 단비가 내린 후 지금은 날씨가 개어 다시 햇볕이 쨍쨍하다. 비가 내리는 기간엔 목압서사를 둘러싸고 있는 지리산에 산안개가 자욱했다. 윤증도 아침저녁으로 태화산에 산안개가 자욱한 모습을 본 모양이다.
필자의 질부(姪婦)인 주경숙(67) 사진작가가 마침 충남 논산의 윤증 고택에 가 촬영한 사진 여러 장을 보내왔다. 윤증 고택의 유명한 장독들과 배롱나무를 찍은 사진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