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에 걸쳐놓은 사다리 몇 백 층이나 될지(架壁危梯幾百層·가벽위제기백층)/ 발이 아파 오르기 어렵다고 말하네.(人言繭步決難登·인언견보결난등)/ 연하 자욱한 불일암 지금 주인 누구일까(煙霞半面今誰主·연하반면금수주)/ 청학이 때때로 내려와 도승을 방문하리라.(峰鶴時來訪道僧·봉학시래방도승)
위 시는 경남 산청군 사람인 니계(尼溪) 박래오(朴來吾·1713~1785)의 시로, 그의 지리산 유람록인 ‘유두류록(遊頭流錄)’에 들어있다. 이 유람록은 그의 문집인 ‘이계집(尼溪集)’ 권 12에 있다. 박래오는 1752년 8월 10~19일(9박 10일) 지리산을 유람한 후 유람록을 썼다. 그는 이성년 허노첨 하성지 박향초 박수오 박태오 등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했다. 첫 구에서 불일암은 절벽 높은 곳에 있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 한다고 말한다. 둘째 구에서는 동행한 허노첨의 아픈 다리가 낫지 않아 불일암에 오를 수 없다고 밝힌다. 셋째 구에서는 불일암에 늘 연하가 자욱하다고 읊는다. 넷째 구에서는 인근에 사는 청학이 불일암의 도승(道僧)을 방문한다고 했다. 불일암 도승을 신선과 동일시한다. 유람은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덕천서원~중산리~천왕봉으로 이어진다. 그런 뒤 영신사 옛터를 거쳐 칠불암에 들렀다가 신흥사로 내려와 8월 15일 쌍계사에 갔다. 그리하여 박래오는 불일암에 들르지 못하고 위 시를 지었다. ‘불일암기(佛日庵記)’에 “쌍계사에서 10리 남짓한 곳에 있으며, 고려 중기에 국사였던 목우자(牧牛子·지눌스님)의 시호가 불일보조인데 이곳이 국사의 도량임을 신빙할 사적이 없어 가히 슬프도다”고 적혀 있다. 보조국사 지눌스님 수행처였다는 것이다.
불일암·불일폭포가 있는 이곳은 고려 때부터 청학동으로 알려졌다. 선비에게 선경(仙境)이자 이상향의 상징적 장소였다. 수많은 선비가 청학동을 찾아 불일암을 다녀갔고 많은 글을 남겼다. 어제 오후에 부산에서 손님 두 분이 목압서사를 방문하셨다. 필자가 연재하는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을 항상 읽는다며, 불일암에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목압서사에서 대략 2.5㎞ 거리다. 필자는 박래오의 위 시를 소개하며 가는 방법 등을 알려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