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一片秋聲落井桐·일편추성락정동
한 조각 가을 소리에 오동잎이 우물에 떨어지니(一片秋聲落井桐·일편추성락정동)/ 늙은 중이 놀라 일어나 가을바람 묻는다네.(老僧驚起問西風·노승경기문서풍)/ 아침에 홀로 걸어 계곡가에 가 서 있으니(朝來獨步臨溪上·조래독보임계상)/ 칠십 년 세월이 거울(수면) 속에 들어있구나.(七十年光在鏡中·칠십년광재경중)
위 시는 기암 법견(奇巖 法堅·1552~1634)의 시 ‘초가을에 느낌이 있어(初秋有感·초추유감)’로, 그의 문집인 ‘기암집(奇巖集)’에 수록돼 있다.
기암 법견은 전라도 부안 출신으로, 13세에 불문에 들었다. 그는 서산대사의 대표적인 제자로,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스승의 뜻을 받들어 승병을 모집하여 의승장으로 활약하였다. 북쪽으로 묘향산부터 남쪽으로 지리산까지, 서쪽으로 구월산부터 동쪽으로 금강산까지 두루 다니며 수행했다. 83세로 입적하였다. 승려의 신분이었지만 유몽인과 신익성 등 많은 명사와 교유하였다.
오동나무 큰 잎이 우물로 떨어진다. 늙은 승려인 시인이 가을을 느끼고 벌떡 일어났다. ‘問西風(문서풍)’이란 ‘그리도 덥더니만 결국은 가을이 돌아왔구나’라고 가을바람을 느낀다는 의미이다. 바람의 한끝이 서늘하다는 것이다. 혼자 천천히 걸어 계곡가로 갔다. 수면이라는 거울에 늙고 볼품없는 승려가 비친다. 칠십 년 해묵은 몸뚱이 하나가 물거울에 비친다.
무더위가 쉽사리 물러가지 않으려고 기를 쓰지만 매일같이 오는 비는 그것을 식힌다. 밤이면 서늘하다 못해 추워 창을 닫는다. 가을이 올라치면 오동나무 잎이 먼저 떨어진다. 그걸 보고 사람들은 ‘아, 이제 가을이 왔구나’ 생각한다. 승려 기암도 마찬가지였다. 오동잎이 우물과 우물가에 떨어진 걸 보니 처연한 마음이 밀려왔다. 당시엔 나이 칠십이면 돌아가고도 남았다고 여겼다.
칠언절구 짧은 시이지만, 많은 뜻을 담았다. 그가 좋은 시를 많이 지을 수 있었던 데는 성균관 유생 출신인 스승의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가끔 특정 종교적인 글을 쓰지 말아 달라는 독자의 주문이 있다. 기암의 위 시는 종교시라기보다 깊은 인생의 성찰이 담긴 시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