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장문에 닿아 포구 아래에 묵는데(夜到長門浦下宿·도야장문포하숙) / 그대 말 들으니 바로 우리나라 소리구나.(聞君言語是鄕音·문군언어시향음) / 때까치 같은 말소리로 시끄럽게 떠들지 않으리(鴃舌且莫咻衆楚·격설차막휴중초) / 억지로 등불 돋우며 함께 마음 논하네(强挑蠻燭共論心·강도만촉공론심)
위 시는 해수 김우정(金禹鼎·1551~1630)의 시 ‘長門浦與姜睡隱沆論懷(장문포여강수은항론회)’로 그의 문집인 ‘海叟先生文集(해수선생문집)’에 수록돼 있다. 그가 거제 장목면 장목항에 도착하여 강항(1567~1618)과 함께 살아서 고국에 돌아온 기쁨을 나누면서 읊은 시다.
42세이던 김우정은 임진왜란 초기 동래성 전투 때 포로로 일본에 잡혀가 49세인 1599년(선조 32) 10월 일본에서 배를 타고 밤에 도망쳐 돌아왔다. 그러나 부모와 처자는 모두 왜군의 칼날에 죽은 뒤였다.
그는 1551년(명종 6) 8월 13일 동래부 산저리(山底里·현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 산저교차로 부근)에서 성균관 생원인 부친 김국평(金國平)의 아들로 태어났다. 임진년인 1592년 4월에 왜군이 쳐들어와 14일에 부산성을, 다음 날인 15일에 동래성을 함락시켰다. 김우정은 이날 벗 김정서와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다.
일본으로 끌려간 그는 1599년 6월 교토에서 강항을 만나 귀국할 때까지 함께 지냈다. 강항은 1593년 대과에 합격한 후 벼슬을 지내다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싸웠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싸우려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왜적의 포로가 되었다. 강항은 일본 오사카로 끌려갔다가 1598년 교토로 이송되었다.김우정과 강항은 다른 포로들과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김우정은 일본에서 몰래 배를 조종하는 기술을 배웠다. 그 덕에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수선생문집’은 1852년(철종 3) 간행되었다. 김우정의 묘소는 그를 모신 동래구 온천동의 향경재(鄕敬齋) 옆에 있다.
필자는 지인들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김우정의 생애를 소개했다. 필자의 박사 지도교수님이 김우정을 발굴해 논문으로 정리하신 바 있다.
조해훈 시인·고전인문학자·목압서사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