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주인공 빌 펄롱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석탄을 배달하다 문득 멈춰 서서 묻는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이는 스펙과 취업을 위해 앞만 보며 질주하는 오늘날 청년들이 마주하는 허무와 꼭 닮았다. 남들이 정해놓은 안전한 트랙 위를 숨 가쁘게 달리다 보면 어느새 ‘나다움’은 희미해지고, 삶은 그저 소모적인 노동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 깊은 매너리즘의 늪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삶의 주도권을 되찾고 내가 세상에 고유한 무언가를 남기고 기여하고 있다는 ‘효능감’이 필요하다. 수동적인 ‘소비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창작자’로 거듭나야 하는 이유다.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일회성 쾌락만으로는 결코 삶의 텅 빈 공허를 채울 수 없음을 깨달은 청년들은, 이제 스스로 무언가를 짓고 만들어내는 행위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묻기 시작했다.
최근 부산 샵메이커즈와 베르크로스터스가 기획한 ‘평일의 창작자들’ 행사가 있었다. 서울 ‘스토리지북앤필름’ 강영규 대표는 모두가 만류하던 해방촌 5평 남짓한 공간에서 서점을 열었다. 경제적 이익이 불확실해도 “내일 당장 눈을 못 뜬다 해도 내 삶은 참 재미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10년째 책을 내온 김져니 작가는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을 빌려, 남들이 먼저 앉아 있는 거대한 의자를 부러워하는 대신 작고 서툴더라도 ‘자기만의 의자’를 직접 만들기로 했던 순간을 얘기했다. 그녀의 책 ‘나르르씨’ 우화에는 어둠 속 고양이에게 스스로 머리에 불을 지르며 “치열하게 불태웠다는 마음 자체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라 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대단한 예술가의 영웅담이 아니라 치열한 일상 속에서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 흔적이었다.
우리는 흔히 청년이 ‘좋은 일자리가 없어서’ 지역을 떠난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국무조정실 통계(2024년 청년의삶실태조사)에 따르면 부산 청년의 78.8%(전국 평균 75.7%, 서울은 85.3%)는 조건만 맞으면 고향에 남겠다는 강력한 정주 의사를 지녔다. 일자리는 청년 정착의 필수 조건이지만 그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단법인 오늘은’의 지역 청년 연구보고서가 지적하듯, 청년이 진정 머물고 싶은 지역이 되려면 ▷사회적 낙인 없이 삶의 방식을 존중받는 ‘숨을 자리’ ▷커뮤니티와 연대하는 ‘만날 자리’ ▷문화를 향유할 ‘즐길 자리’ ▷장기적 비전을 그릴 ‘꿈꿀 자리’가 일상 반경 안에 채워져야 한다. 내가 온전히 나로서 존중받으며 세상에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는 이 4개의 자리가 바로 청년들의 정서적 안전망인 셈이다.
도시는 수많은 펄롱들의 땀 흘리는 성실한 노동으로 굴러가지만, 맹렬하게 돌아가던 쳇바퀴를 잠시 멈추고 옆을 돌아봤을 때 기꺼이 찾아가 온전히 숨 쉴 수 있는 ‘자리’가 도시에 마련되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 정책을 기획하는 행정과 사회의 시선도 이 지점에서 달라져야 한다. 가성비의 잣대로 청년들의 서툰 창작을 ‘돈 안 되는 취미’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매너리즘을 극복하고 지역에 정착하기 위한 치열한 ‘생존 수단’임을 인지해야 한다. 그 도시를 진정 살아 숨 쉬게 만드는 것은 쳇바퀴를 멈추고 무언가를 새롭게 지어내는 창작자들이다.
무엇보다 정책적 창작 지원을 전문 ‘예술인’의 영역으로만 국한하는 낡은 프레임에서 벗어날 때다. 평범한 청년들이 다양한 일상 영역에서 새롭게 시도하는 초기 단계의 창작 활동을 적극 장려하고 지원하는 시작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다. 거창한 예술이 아니어도 괜찮다. 동네 서점과 같은 제3의 공간이 이들의 ‘숨을 자리’와 ‘만날 자리’를 지지하는 든든한 베이스캠프가 될 수 있도록 세밀한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평일의 창작이야말로, 청년들을 구원하고 부산의 다음 페이지를 써 내려갈 가장 강력한 동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