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지트를 옮겼다. 예술가들이 모여있는 또따또가가 좋아서 중앙동에 자리 잡은 지 6년 만이다. 손 흔들 정도 친한 나무들과 소박한 갤러리, 길거리 카페와 오래된 맛집은 이사를 망설이게 했다.
이번에는 초량이다. 1960년대 건축된 주택이다. 크지 않으나 공을 들인 집이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나뭇잎의 어우러짐이 수면에 비친 빛처럼 일렁여 설렌다. 또 바람은 어떠한가. 요즘은 새벽에 일어나 그 공간을 만끽하는 호사를 누린다. 느긋하게 몸단장하던 ‘치즈’ ‘고등어’ ‘턱시도’ 세 마리 고양이도 낯선 생명체를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다.
결혼을 못 한 남자는 짐이 많다. 버리라는 사람도 없고 자식의 성장에 따라 공간을 빼앗길 일도 없다. 그래서 살아온 만큼의 물건들, 애착만큼의 물건들, 미련만큼의 물건들이 가득이다.
6년 전 이사 때는 짐을 정리하다 ‘미련 1’에게서 받은 엽서의 글씨가 시간에 바랜 것을 발견했다. 미련의 크기만큼 망치로 가슴을 치는 듯했다. 이번에는 ‘미련 x’로부터 받은 작은 유리잔을 찾았다. 잘 포장된 것으로 보아 미련이 상당하다. 하지만 물건은 생생한데 x가 기억나지 않는다. 또 망치에 맞았다. 상대의 영원을 꿈꿨으나 내가 영원하지 못함이었다. 이런 불균형은 아프다. ‘미련 x’에서 ‘아득함 1’로 카테고리가 옮겨졌다. 여전히 버릴 수는 없었다.
지난달 11일 자 뉴욕타임스의 ‘정리정돈의 뇌과학(The Neuroscience of Decluttering)’을 재미있게 읽었다. “무엇이 가치 있는지를 결정하는 뇌의 한 부분은 ‘나’라는 정체성을 인식하는 부분과 겹친다. (중략) 또 보관하는 물건은 기억을 되살리는 단서가 되어, 지난 일을 다시 선명하게 떠올리게 해 준다.” 뇌과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사물을 버리기 어려운 이유는 뇌가 이러한 행위를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는 일’로 인식하고 저항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울 종로의 역사 경관과 돈의문박물관마을, 그리고 부산항 1부두에 이르기까지, 오래된 유산의 보존과 개발을 둘러싼 갈등에 대해 생각한다. 국가와 도시의 문화유산은 국민과 시민의 정체성이다. 모든 유산을 보존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유산에 우리의 정체성, 우리 도시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는 공공의 인식이 존재하는지 살피고 생각을 나누어야 한다.
그런데 그 공공의 인식이라는 것이 늘 같은 모습일까. 조선의 궁궐에서 살아본 사람은 없지만 우리는 그 건축을 지키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다. 반면 몇십 년 전까지 누군가의 집이었고 일터였던 근대건축은 사정이 복잡하다. 같은 건물을 두고 식민지의 상처를 기억하는 사람, 어린 시절의 골목을 떠올리는 사람, 낡은 벽돌과 높은 천장이 그저 멋진 사람이 느끼는 가치는 서로 다르다. 보존하자는 결론은 같아도 지키려는 이유는 같지 않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이유가 계속 새로 생겨난다는 점이다. 영도 물양장에 사람들이 모여 마켓을 열고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튼다. 오래된 창고와 공장의 거친 표면에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를 더하고, 그 안에 전시와 공연, 만남을 집어넣는다. 누군가에게는 쓸모를 다한 산업시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도시 어디에서도 만들기 어려운 무대가 된다. 건축이 문화를 담는 그릇이라면, 이들은 거기에 없던 문화를 만들어 그릇의 가치마저 바꾸고 있다.
이를 흔히 ‘활용’이라 부른다. 그러나 기존의 활용이 오래된 건물을 어떻게 다시 쓸 것인가의 문제였다면, 지금 눈앞의 일은 조금 다르다. 사람과 활동이 모이고, 낯선 방문이 반복되고, 작은 장사가 생기고, 그곳에서만 가능한 문화가 자라난다. 건축의 가치가 사람을 부르는 동시에 사람이 건축의 가치를 만들어낸다. 보존이 먼저이고 활용은 다음이라는 순서조차 흐려진다.
물론 걱정도 있다. 식민지의 착취와 산업화의 고단함을 증언하던 공간이 그저 사진 잘 나오는 카페로만 기억된다면 건물은 남아도 역사는 사라질 수 있다. 멋진 창고만 살아남고 평범한 노동자의 집은 사라지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새 문화가 들어왔다고 무조건 환호할 일도, 상업적이라고 무조건 얕잡아볼 일도 아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잊게 하는지 묻는 일이 필요하다.
오래된 건축의 가치를 판단하는 전문가의 눈은 여전히 중요하다. 다만 그 눈이 건립연도와 양식, 원형의 보존에만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지금 그곳에서 어떤 삶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삶이 건축의 의미를 어떻게 바꾸는지도 함께 보아야 한다. 시민의 보존의식은 학자가 찾아낸 가치를 뒤늦게 수긍하는 절차가 아니다. 때로는 거리에서, 작은 마켓에서, 커피 한 잔을 나누는 사이에 먼저 싹트기도 하는 요즈음이다.
작은 유리잔 하나도 누구의 것인지 잊었지만 여전히 버리지 못한다. 내 삶의 한 시절을 품고 있어서이다. 도시의 오래된 건물도 그렇다.
다만 도시는 개인과 달리 다음 세대가 그 건물에 새로운 기억을 쌓을 수 있다. 건축유산의 보존은 과거를 붙잡아 두는 일만이 아니라, 오래된 것에 아직 오지 않은 삶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