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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음식과 잘 어울리는 다양한 품종의 오스트리아 와인들. |
추석이 다가오면 사람들의 마음은 조금씩 고향을 향한다. 기차표를 구하고 자동차를 점검하며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한다. 오랜만에 만날 가족을 생각하며 식탁에 올릴 음식도 정성껏 마련한다. 추석은 한 해 농사의 결실을 감사하며 가족과 친척이 모여 햇곡식과 음식을 나누는 명절이다. 그래서 추석 음식에는 유난히 계절의 맛이 담겨 있다. 햅쌀로 빚은 송편과 토란국, 각종 전과 나물, 잡채, 갈비찜과 산적까지 평소에는 한자리에서 만나기 어려운 음식들이 추석 밥상 위에서 한 가족처럼 어울린다.
이런 밥상에 와인 한 병을 놓아보면 어떨까. 처음에는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와인은 의외로 다양한 추석 음식과 잘 어울린다. 추석 음식처럼 여러 가지 맛이 한꺼번에 올라오는 식탁에서 와인의 장점이 더 살아난다. 담백한 전이나 나물에는 산뜻한 독일 리슬링이나 오스트리아 그뤼너 펠트리너를 곁들여볼 수 있다. 기름진 전의 풍미를 산도가 씻어주고, 나물의 향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불고기나 갈비찜처럼 양념이 진한 음식에는 과실 풍미가 풍부하면서 지나치게 무겁지 않은 피노누아나 이탈리아 레드와인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추석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송편에는 약간의 당도가 있는 리슬링이나 스파클링와인도 재미있는 조합이다. 다양한 맛 사이에서 와인은 음식과 음식 사이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명절 식탁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와인이 가장 좋은가’가 아니다. 함께한 가족의 취향과 음식에 맞는 와인을 고르는 것이다. 가족이 모이는 명절 식탁에서 페어링의 의미는 음식과 와인을 맞추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다시 연결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이 차려준 추석 밥상을 그저 당연하게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 직접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해 보니 한 상의 음식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이 담겨 있는지 알게 된다. 젊었을 때의 추석이 ‘고향에 가는 날’이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한 날이 된다.
식탁의 모습도 해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아이들은 자라 독립하고 부모님은 나이가 들어간다. 한때 당연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식탁의 빈자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추석에 드는 술잔은 조금 천천히 바라보게 된다. 와인 한 병을 따르며 “이 와인은 어디에서 왔을까”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음식 이야기가 나오고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이어진다. “아버지는 갈비찜을 참 좋아하셨지.” “어머니가 만들던 송편은 정말 맛있었는데.” 그렇게 와인은 어느새 음식의 반주를 넘어 기억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추석의 식탁에는 먼저 떠난 사람을 기억하는 마음, 지금 함께하는 가족에 대한 감사, 그리고 다음 세대에 대한 기대가 함께 올라온다.
이제부터 차례를 지내는 전통과 예법은 각 가정의 방식대로 존중하되, 가족들이 모두 모인 저녁 식탁에서는 와인 한 병을 열어보자. 비싼 와인일 필요는 없다. 함께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와인이면 충분하다. “올해도 이렇게 함께할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그 한마디면 건배사는 충분하다.
와인은 시간을 멈추게 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가 흘러가는 시간을 잠시 바라보게 한다. 좋은 음식과 좋은 와인보다 더 좋은 것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얼굴과 미처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일 것이다. 한가위 보름달처럼 풍성한 식탁에서 와인 한 잔을 사이에 두고 가족의 이야기가 오래 이어지기를 바란다. 와인은 음식보다 사람과 먼저 페어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