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때 컴퓨터로 문서 작업을 해내는 공대 친구들이 참 부러웠다. 1990년대 초 PC가 보편화되기 전이라 문과생은 대부분 연필이나 볼펜으로 리포트를 작성할 때였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펴놓고 이곳 저곳 필요한 부분을 발췌해 전체 글을 구성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컴퓨터로는 관련 대목을 워드로 옮긴 다음 순서만 재배치하는 방식이어서 어렵지 않게 글이 완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끼리 부러움 반 시샘 반으로 수근거리곤 했다. “쟤들은 과제하기 쉽겠네. 짜깁기만 잘하면 되잖아.”
누군가의 글이 AI 작성인지 혹은 그 도움을 받았는지 여부를 판별하는 프로그램(판그램)을 돌려 보니 고위 공직자 등 유명인의 X 글 상당수가 AI 작성이나 AI 조력이라는 결과가 나왔을 때 그리 놀랍지 않았다. 논문과 교재 저술이 주업인 대학교수조차 글쓰기에 엄청난 부담을 느낀다는 사실을 기자가 되고서야 알았다. 심지어 직능단체 대표로 선출된 모 전문직 종사자에게 A4 한 장짜리 당선 소감을 부탁했다가 정중하게 거절당한 일도 있다. 머릿속에 엉켜있는 생각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하는데 골머리를 앓는 사람에겐 AI만큼 유용한 도구가 없다.
AI 위험성과 개발 속도 조절론이 부상하는 상황에서 인간이 AI에 대해 ‘인지적 항복’ 상태에 빠져 든다는 우려까지 제기됐다. ‘인지적 항복’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연구팀이 만든 용어로, AI에게 생각이나 판단까지 의존하는 현상을 말한다. 일종의 ‘사고 외주화’다. 최근 뉴욕타임스가 매사추세츠공대(MIT) AI교육위원회 보고서를 인용한 보도를 보면 중국 중고생 2만6000명 추적 분석에서 AI 도입 후 숙제 점수가 18% 올랐지만 AI 도움 없는 시험 점수는 20% 떨어졌다. AI를 글쓰기 보조수단으로 사용한 사람은 자기가 쓴 에세이 내용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자료를 복사만 해놓고 자기가 그 글을 읽었다고 착각한다.” 르네상스적 지식인이자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가 복사기 탄생을 보고 했던 말이다. 첨단 기기 등장은 인간 지적 능력의 퇴화 가능성을 걱정하는 목소리와 늘 함께 했다. 1960년대 전자계산기, 1990년대 내비게이션이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바둑 대국이 끝난 뒤 복기가 가능한 것은 기사가 한 수 한 수를 놓는 매순간 피 말리는 고민을 해서다. 지금까지는 세대가 거듭될수록 인류 지능이 진보했는데 AI 때문에 사상 처음으로 퇴보할 수도 있다는 경고가 섬뜩하다.
강필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