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에게 1998년은 금년 여름의 폭염만큼이나 뜨거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해 여름도 무덥긴 했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봄부터 여름까지 온통 무더운 열기로 가득 차 있던 공장들을 돌아다니며 노동자들을 만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가죽이 만들어지는 곳에는 뜨거운 열을 화로처럼 하루 종일 뿜어내는 건조로가 돌아가고 있었다. 공장에선 디메틸포름아미드(DMF)라는 유기용제를 원료로 썼는데, 이 용제가 유난히 급성 독성간염을 일으켜 1년에 1, 2명씩 사망자가 발생하곤 했다. 새로 입사해 1, 2주일 남짓 일한 사람이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입원한 뒤 1, 2개월 안에 급성 간독성으로 사망하는 일이 보고되면서 사태의 심각성이 알려졌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계약직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나는 전국의 DMF 건강영향 실태조사에 참여 중이었다.
무더운 사업장 한켠에 차려둔 조사실에서 “배 앓이 없으세요? 소화 잘 되시나요”라는 질문을 무한 반복하며 땀 흘리던 우리를, 이 업계 수십 년 경력의 공장장은 민첩하게 도와주었다. 힘든 하루가 끝난 뒤 협조에 대한 감사와 덕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초보 직업병 의사였던 내게 그가 한 말을 나는 오랫동안 잊을 수 없다.
“이 바닥에 배 앓이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누가 있냐? 그걸 통과해야 근무할 수 있어. 가끔 심하게 아픈 사람은 응급실에 급히 데려가지. 다들 그렇게 해왔지. 이 바닥에 전해지는 전설이 뭔지 알아? 갑자기 땅바닥에 구를 정도로 배가 아프다니까 의사가 응급 맹장 수술을 해줬다더라고!”
공장 사람들은 몸에 좋지 않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알고도 ‘관행’이라는 이름의 선의로 포장하여 저렇게 처리할 수도 있는 것이구나!
최근 배터리 제조 중소기업에서 벌어진 납중독 사건의 이면에도 정확히 이와 같은 감각이 느껴진다. 납을 취급하는 노동자에게서 혈중 납 수치가 높게 나왔거나 높을 것으로 예상되자, 사측은 법적으로 정해진 건강진단을 앞두고 킬레이트 주사제를 투여했다. 노동자에게는 ‘피로 회복용 영양제’나 ‘비타민 주사’로 속였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성분을 숨긴 것이 사실이라면, 건강검진에서 혈중 납 수치가 높게 나오지 않기를 바랐던 거라고 생각된다. 즉, 납이 인체에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배터리 제조 공정에서 납 노출은 피할 수 없는 위험이다. 그런 위험을 최소화하려면 공기 중의 납 농도를 측정하고, 노동자들의 혈액이나 소변을 정기적으로 검사해 납의 체내 농도를 파악해야 한다. 당장 병이 발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누적되는 피해를 막으려면 현재의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작업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근로자의 혈액 검사 수치만 일시적으로 낮추는 것은 치료가 될 수 없으며, 건강검진이나 환경개선을 회피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일부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이러한 관행이 오랫동안 묵인되어 왔다면, 이는 28년 전에 목격한 무지와 선의로 포장된 ‘고의’와 닮은 꼴이다.
1998년의 DMF 전국 역학조사 결과는 여러 모로 중요한 제도적 개선으로 이어졌다. DMF를 취급하는 사업장은 이 물질을 특별히 관리·측정해야 했고, 입사 전 및 입사 후 2주 내에 간 기능 검진을 의무화하는 법이 생겼다. 이런 사업장은 관공서의 단골 점검 대상 리스트에 상시 오르게 되었다.
무지가 아닌 고의는, 그렇게 해도 되는 환경에서 되풀이된다.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나 다시 한번 마주하는 이러한 관행은 마주칠 때마다 씁쓸하고 놀랍다. 그런 관행이 통하지 않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그런 편법이 용납되지 않는 작업장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우리의 숙제이다. AI 시대인 지금, 우리는 다방면으로 고위험 노동자와 공정을 추적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다. 고의와 관행을 묵인하지 않는 것, 선의로 착각할 수 있는 무지의 가능성을 줄이는 것, 그리고 ‘그렇게 편법을 쓰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제도와 형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