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지상파에서 ‘딱따구리’를 방영했다. 원제는 ‘우디 우드페커’로, 미국 애니메이션이었다. MBC에 ‘톰과 제리’가 있었다면 KBS에는 ‘딱따구리’가 있었다. 붉은 머리에 파란 몸통을 가진 우디는 가는 곳마다 소란을 일으키는 사고뭉치였다. 쉴 새 없이 떠들고 나무를 쪼아댔으며, 어디서든 알아챌 수 있는 요란한 웃음소리를 냈다. 나는 우디에게 푹 빠져버렸다. 방영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스케치북을 꺼내 우디를 그렸다. 나무에 붙어 긴 부리로 둥치를 쪼아대는 딱따구리 우디.
“정말 똑같네.” “똑같이 그렸네.” 집에 놀러 온 엄마 친구들이 내 그림을 보고 한마디씩 했다. 내 눈에도 똑같아 보였다.
나는 똑같이 그리는 데 자신이 있었다. 스케치북을 우디로 가득 채운 다음에는 탁자 위 메모지와 달력 뒷면에도 그렸다. 어디든 우디를 그렸다. 똑같이 그렸다는 말이 재능이 있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1학년 때 인체 드로잉을 했다. 가장 먼저 배운 건 짧은 시간 안에 모델의 특징을 잡아 그리는 누드 크로키였다. 인체를 도화지로 옮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모델은 대개 중년 여성이었고, 처진 가슴과 접힌 뱃살까지도 허투루 넘기지 않아야 제대로 된 선이 나왔다. 수십 장을 그리다 보니 여성의 몸을 제법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방향에서든 선을 끊지 않고 몸의 특징을 잡아낼 정도였다.
어느 날 젊은 남자가 가운을 입고 실기실로 들어왔다. 실기실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여자대학교라서 여자뿐이었다) “남자는 2학년 때 그린다며?” “3학년이 아니고?” 남자는 대기용 의자에 앉더니 팔과 다리에 로션을 천천히 문질러 발랐다. 바로 옆에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달콤한 머스크 향이 끼쳐왔다. 나는 서둘러 모델이 잘 보이지 않는 가장자리로 이젤을 옮겼다. 곧 교수가 들어왔다. “오늘은 남성의 신체를 그립니다. 여성 모델과는 선이 매우 다를 거예요.”
남자가 단상 위로 올라갔다. 하얀 실크 가운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자 몸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로션을 바른 구릿빛 몸이 돌덩이처럼 단단해 보였다. 나는 오래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교수가 남자에게 말했다. “오늘은 학생이 아니라 모델이 움직입니다. 3분에 한 번씩 방향을 바꾸세요.”
십여 분 뒤 남자가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번에는 남자의 성기가 정면으로 보였다. 한밤에 갑자기 정전이라도 된 듯 머릿속이 캄캄해졌다. 쥐고 있던 오일스틱을 떨어뜨리자 남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오일스틱을 주우려고 몸을 숙였다. 그러자 앞치마 앞주머니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려고 모아두었던 동전이 쏟아져 나왔다. 동전은 사방으로 굴러갔다. 어떻게 그 많은 동전을 주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울고 싶은 마음으로 실기실을 나와 화장실로 뛰어갔다.
화장실에는 동기 한 명이 창틀에 걸터앉아 있었다.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동기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다시 물었다. “저 다리에 얽힌 얘기 알아?” 화장실 창밖으로 녹슨 다리가 보였다. 절벽으로 이어진 저 구름다리에서 목을 매고 죽은 선배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다리 귀신 말하는 거지?” “저기서 죽은 선배 애인이 바람둥이였어.” “다른 사람 만나면 되지, 뭐 때문에 죽었을까?” “남자가 누드모델이었다더라. 한체대 학생이었는데 여럿이 스키장 갔다가 눈이 맞았대.” 동기가 나를 보며 덧붙였다. “너, 누드모델이랑은 절대로 사귀지 마라. 그거 우리 과 불문율이야.” 나는 그만 헛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덕분에 긴장했던 마음도 풀어졌다.
남자의 몸은 여자의 몸과는 완전히 달랐다. 더 강하고 곧은 선이 필요했다. 나는 오일스틱 대신 콩테를 썼다. 수십 장을 그리고 나자 남자가 어느 방향으로 몸을 돌려도 망설이지 않고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가끔 한밤에 정전이라도 된 듯 머릿속이 캄캄해질 때가 있다. 특히 난생처음 겪는 일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