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7월 부산에서 열린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인류 공동의 유산을 어떻게 지키고 다음 세대에 전할지 논의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린 위원회에서 채택된 ‘세계유산에 관한 부산 선언’은 세계유산분야의 디지털 전환과 그 책임을 국제사회의 주요 의제로 제시했다. 오래된 유산이 보존뿐만 아니라 오늘의 의미있는 데이터로 전환하고 다시 미래의 자산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부산선언의 의미를 확인하고 기록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수원 화성이다. 1796년 완공된 화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장안문과 창룡문 등이 파괴되고 성벽 곳곳이 무너지는 등 크게 훼손됐다. 1970년대 대대적인 복원 과정에서 1801년 간행된 화성성역의궤에 담긴 설계와 공법, 자재, 공사 기록을 바탕으로 화성은 원형에 가깝게 복원돼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의궤에는 공사의 이유와 참여자까지 담겨 있었다. 당대의 경험을 후대가 재현하고 활용할 지식으로 전한 기록문화가 화성을 되살린 것이다.
인공지능 전환(AX) 시대에 이 기록문화는 새로운 산업적 의미를 갖는다. AI의 활용 수준은 데이터의 양뿐만 아니라 정확성과 연결성에 좌우된다. 데이터센터가 정보를 저장하고 연산하는 현대판 사고(史庫)라면, 그 안을 채우는 산업 데이터는 미래를 위한 실록과 의궤다. 데이터의 축적과 AI로의 전환이 산업의 미래를 좌우하는 핵심이다.
조선산업은 선박의 설계와 생산부터 운항과 정비까지 방대한 데이터를 만들어낸다. 설계 및 변경, 자재·기자재 조달, 절단·용접·조립, 품질 검사와 시운전 기록, 인도 후 운항 상태와 연료 사용량, 고장·정비 이력도 수십 년간 축적된다. 이를 연결하면 선박의 전 생애주기를 이해하고 개선할 지적 자산이 된다.
그러나 수많은 건조와 운항 경험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데이터는 기업과 부서, 장비와 시스템별로 흩어져 있고 형식과 기준도 제각각이다. 선박이 인도된 뒤 사장되는 정보도 적지 않다. 더 큰 공백은 아직 데이터로 전환되지 못한 숙련자의 암묵지다. 숙련자는 용접 불꽃과 소리, 철판과 장비의 미세한 변화만으로 이상을 감지하고 작업 방법을 조정한다. 눈과 귀, 손끝에 쌓인 경험은 매뉴얼만으로 담기 어렵다. 작업 환경과 센서 데이터, 작업 이력, 판단 근거를 영상과 함께 기록해 AI가 학습할 산업 자산으로 전환해야 한다.
구조화한 암묵지를 기존 데이터와 연결하면 AI는 최적 공정을 제안하고 품질 이상을 조기에 감지할 수 있다. 숙련자의 경험은 신규 작업자 교육과 현장 의사결정을 지원하고, 운항·고장 이력은 디지털 트윈, 자율운항 기술의 고도화와 정비 시점 예측에 활용된다. 한 척에서 얻은 경험이 다음 선박의 설계와 생산으로, 바다에서 확인된 문제가 조선소와 선사의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미래 AI 기반의 조선산업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산업계, 그리고 연구 기관의 협력과 역할 분담이 필수적이다. 정부는 선박 전 생애주기의 데이터 표준과 안전한 저장·활용 기반을 마련하고, 기업은 공통 기준에 따라 현장 데이터를 축적하며, 학계 및 연구기관은 데이터 연결과 품질 검증, 암묵지 등을 체계화해야 한다. 핵심 기술과 영업비밀을 보호하면서 공동 활용할 데이터의 범위와 원칙도 정립해야 한다. 더하여 암묵지 데이터센터 구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는 숙련자를 대체하는 시설이 아니라 그 경험을 축적·검증해 다음 세대에 전하고, 독자적인 데이터 기반을 갖추기 어려운 중소조선소와 기자재업체도 함께 활용할 AX 인프라가 될 수 있다.
미래 조선산업의 경쟁력은 얼마나 많이 건조했는가 뿐만 아니라, 한 척을 건조할 때마다 얼마나 많은 지식과 경험을 축적했는가에 달려 있다. 기록은 행정의 흔적이나 과거의 결과물이 아니라 미래 기술을 만드는 자산이다. 과거의 기록이 무너진 화성을 되살렸듯, 오늘 축적하는 산업 데이터는 AX 시대 K-조선의 미래를 새롭게 세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