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김준희의 클래식 인사이트] 여름의 끝자락, 브람스

  • 김준희 고려대 외래교수
  •  |   입력 : 2026-08-30 18:53:21
  •  |   본지 21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요하네스 브람스
9월이 되면 시간이 꽤 흘렀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아직 한 해의 중간쯤에 와 있는 것 같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시계는 조금 늦게 가는 것 같다. 무언가 시간이 늦게 가는 것 같은 작곡가, 가을 하면 브람스. 문득 유학 시절 후반부를 잠식했던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 Bb장조, 작품 83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나는 이 곡을 혼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연습했다. 어떤 날은 연습 시간 전부를 이 곡에 쓰기도 했고, 꽤 많은 날 연습의 시작이 이 곡의 4악장이었다. 돌이켜보면 레슨을 받지도 않는 곡을 그렇게 오랫동안 연습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대학원 수업과도 전혀 관계없는 이 곡이 어쩌면 그 시절 나에게는 작은 출구였을까.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상당히 규모가 큰 작품이다. 모두 네 악장으로 연주 시간도 50분에 달한다. 피아노 협주곡이지만 구성과 성격에서 교향곡에 가까운 면모를 보여준다. 1악장은 담담한 호른의 선율로 시작한다. 곧 피아노가 이를 이어받는데, 브람스의 다른 여러 작품에서처럼 이 곡에서도 호른의 존재감은 매우 크다. 호른을 즐겨 연주한 아마추어 음악가 아버지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2악장은 독특한 스케르초 악장이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리듬을 빠르게 주고받으며 음악에 긴장과 활기를 더한다.

3악장은 마치 큰 오케스트라 안에 작은 실내악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첼로가 긴 선율을 시작하고 오보에와 플루트가 곁에서 소리를 보탠다. 피아노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 첼로가 혼자 길게 노래하는 선율에는 브람스의 짙은 낭만성이 배어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 협주곡의 3악장을 특히 인상 깊게 기억하는 것 같다. 첼로의 선율은 뜨거운 구애의 메시지라기보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 사이의 진한 우정과도 같은 격려에 가깝다. 편안함과 다정함이 함께 하는 3악장은 마지막에 이르러 첼로와 피아노의 속삭이는 대화로 끝난다. 오래된 친구 사이에서만 가능한 사려 깊은 대화처럼.

4악장은 유난히 표정이 많은 악장이다. 아주 가볍게 시작했다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주고받는 사이 분위기가 몇 차례 바뀐다. 장난스럽게 들리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어느새 진지한 서정성이 묻어난다. 마치 얼굴을 계속 바꾸는 듯한 4악장의 마지막은 처음의 가벼움은 온데간데없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한꺼번에 힘을 쏟아내며 곡을 끝맺는다.

브람스가 이 곡을 완성한 것은 마흔여덟 살 때였다. 이미 자신의 음악 세계를 확고하게 만들어가던 시기였지만, 이 협주곡에는 뜨거운 젊음의 에너지가 넘친다. 원숙함과 열정이 함께 있는 곡이다.

열흘 전, 이 곡을 음악회에서 오랜만에 들었다. 워낙 규모가 큰 작품이라 무대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곡은 아닌데, 오랜만에 실연으로 들으니 역시 이 작품이 가진 규모가 실감 났다. 그날 협연자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였다. 예원학교 시절 작곡에도 재능이 뛰어났던 그 친구를 우리는 ‘베토벤’이라고 불렀다. 세월이 훌쩍 지나 브람스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브람스’로 별명을 바꿔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렬함과 섬세함이 있었고, 동시에 여유도 있었다. 때로는 매력적일 만큼 요염하게 프레이즈를 끌고 가기도 했다. 브람스의 중후함을 한껏 담아내면서도 그의 소리는 여전히 젊었다. 그 연주를 듣고 있으니 유학 시절 연습실에서 이 곡을 붙들고 있던 시간이 문득 떠올랐다.

어느덧 우리가 브람스가 이 곡을 쓰던 시기를 가까이 바라볼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에 잠시 기분이 묘해졌다. 가을이 온전히 오기 전, 인디언 서머처럼 다시 뜨거운 날들이 찾아올 것 같다. 시간은 조금 늦게 가도 좋겠다. 여름의 끝자락과 가을 사이, 느리게 걷는 시간과 함께 브람스의 음악에 천천히 잠겨보고 싶은 계절이다.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국민연금 한 번도 못 낸 청년 21만명…10명 중 9명은 '실직'"
  2. 2[날씨칼럼] 날씨와 기후 사이, 평년값으로 읽는 10월
  3. 3[속보] 재커라이어, 나흘 만에 경질.. ‘역대 최단 기간’ 백악관 대변인
  4. 4[속보] 추미애 “순직 소방관께 깊은 애도, 근무 환경 살피겠다”
  5. 5‘부산살이’ 한 달 된 부캉이…주말 북항 친수공원 인파 몰려
  6. 6부산·울산·경남 가끔 구름 많다가 밤부터 흐려져
  7. 7부천 공장 화재 순직 소방관 장례 '경기도청장'으로 엄수
  8. 8제자 성추행한 초등 교사에 기부금 전달한 전현직 교사 '불구속 송치'
  9. 9"통합 앞둔 발전5사, '8020억 자회사 부채' 승계계획 전무"
  10. 10부산 주유소 휘발유 평균가 ℓ당 1838.3원… 전주보다 1.2원 ↓
  1. 1[속보] 추미애 '소방 재정 빨대' 발언 사과…“폄훼 의도 없어”
  2. 2김민석, '재정 빨대' 발언 사과... "추미애에게도 사과 요청했다"
  3. 3국힘, 秋 ‘재정 빨대’ 발언 사과에 “‘사과 바라시니까’…끝까지 오만”
  4. 4[정가 인&아웃] 지역현안 해결사 이헌승 국힘 부산 국회의원, 국제신문 회생에도 팔 걷어
  5. 5[속보] 김민석 "'조희대 탄핵 추진' 논의 공식화"
  6. 6이 대통령 "부마항쟁과 5·18, 헌법 담아내야" 국회에 개헌 논의 촉구 (종합)
  7. 7이헌승 "국제신문 실질적 대주주 조사 미흡" 질타에 부산노동청장 "다음주 면담"
  8. 8北, 잠수함발사 전략순항미사일 2종 시험발사(종합)
  9. 9李대통령 지지율 39%, 하락세 멈췄다…민주 36% 국힘 27%
  10. 10李대통령 “부마항쟁과 5·18 헌법 수록 개헌, 국회가 나서달라”
  1. 1"국민연금 한 번도 못 낸 청년 21만명…10명 중 9명은 '실직'"
  2. 2"통합 앞둔 발전5사, '8020억 자회사 부채' 승계계획 전무"
  3. 3부산 주유소 휘발유 평균가 ℓ당 1838.3원… 전주보다 1.2원 ↓
  4. 4부산 이전 1차 공공기관 4곳, 수도권에 여전히 495명 잔류
  5. 5부산TP 수장 중기부 승인…신임 기관장들 내주 취임
  6. 67.5% 폭락 ‘녹아내린 코스피’…7000서 7일 만에 5500으로(종합)
  7. 7누리호 탄 군집위성, 발사 14시간 만에 첫 지구 촬영 성공
  8. 8부산 9월 취업자 9000명 늘었지만…'경제허리' 40·50대 3만명↓
  9. 9‘신뢰 시그널’ 없는 증시…외인 이달만 18조 투매
  10. 1040돌 수산무역협회도 부산시대 연다
  1. 1[날씨칼럼] 날씨와 기후 사이, 평년값으로 읽는 10월
  2. 2[속보] 추미애 “순직 소방관께 깊은 애도, 근무 환경 살피겠다”
  3. 3‘부산살이’ 한 달 된 부캉이…주말 북항 친수공원 인파 몰려
  4. 4부산·울산·경남 가끔 구름 많다가 밤부터 흐려져
  5. 5부천 공장 화재 순직 소방관 장례 '경기도청장'으로 엄수
  6. 6제자 성추행한 초등 교사에 기부금 전달한 전현직 교사 '불구속 송치'
  7. 7"뉴스거리 만들려 범행" 인천 흉기난동범 최충락 주거지 압수수색
  8. 8통영서 단체 수영하던 50대, 1.8㎞ 표류…해경 구조
  9. 9이태원 참사 유족, 4주기 앞두고 진상규명 촉구…"책임자 처벌" 외치기도
  10. 10광주서 승합차·시내버스·오토바이 추돌…2명 경상
  1. 1김도영의 KIA냐, 오스틴의 LG냐
  2. 2득점은 킹, 리바운드는 롱…KCC 살릴 ‘믿을맨’ 찾았다
  3. 3자금 숨통 틔웠다…LIV골프 살아날까
  4. 4[뭐라노] 롯데, 이젠 성찰할 때
  5. 5프로야구 역대급 흥행에도 쪼그라든 ‘거인 팬심’
  6. 6인종차별 당한 엄지성…英 경찰 수사
  7. 7거인 3년 연속 7위…레이예스·한동희는 날았다
  8. 8황성빈은 첫 도루왕…끝까지 뜨거웠던 타이틀 경쟁
  9. 9한화, 새 사령탑에 류지현…3년 20억원
  10. 103년 無가을로 계약 만료…김태형 감독 운명은?
우리은행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학교 통폐합 지역 맞춤형으로 접근”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해운기업 유치, 해사법원 신설 “해양수도 부산 경쟁력 키울 것”
강동진의 도시이야기 [전체보기]
바흐를 찾아간 나, 한국을 꿈꾸는 그녀
세계유산위원회, 부산의 시간을 세계와 나누다
경제프리즘 [전체보기]
소비 아닌 문화 생산 주체 오페라하우스
한국 갯벌의 2단계 확대 등재 의미
과학에세이 [전체보기]
AI 시대, 부산 R&D의 대전환
원자력 청출어람, 스승을 가르치다
국제칼럼 [전체보기]
사라지는 것, 귀 기울일 것
열린 사회와 그 적들
기고 [전체보기]
배의 피부를 지키는 기술은 도장이다
거장은 떠나도, 오케스트라는 남아야 한다
기자수첩 [전체보기]
금고 이사장 전횡, 지금도 진행중
엘리트 자평해온 市 공무원…생중계 회의서 능력 입증을
김준희의 클래식 인사이트 [전체보기]
여름의 끝자락, 브람스
여름날의 애상, 왈츠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다대포에서 만난 퇴계 이황
세종시대 음악이 전해진 이유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북극항로, 첫 배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 배다
솔직할 수 있는 용기, 당신에게도 닿기를
도청도설 [전체보기]
은정이라는 이름
다시 영화의 시간
독자 투고 [전체보기]
새로운 시작 ‘황혼 이혼’
무료 화장실 깨끗하게 쓰자
메디칼럼 [전체보기]
요추부 척추관협착증, ‘메포츠’로 극복하기
B형 간염 ‘바이러스 수치’에 ‘급여’ 맞춰야
목지수의 도시브랜드 산책 [전체보기]
랜드마크 시스템의 시대
북항 돔구장에서 야구 보며 사우나를
박지욱의 뇌력이 매력 [전체보기]
건망증, 이렇게 잡자
운동으로 해마를 키우자
박진희의 컬처 픽 [전체보기]
‘부캉이’ 스펙터클에서 공존으로
부산 문화정책, 지금 필요한 선택
사설 [전체보기]
초대 중수청장, 내편 네편 아닌 국민편에 서라
지자체, 현수막 법 준수하고 실태부터 파악해야
세상읽기 [전체보기]
다민족 사회
부캉이가 북항에 던진 질문
안재철의 연결하는 공간 [전체보기]
지구와 도시의 연결을 묻다
해양수도 부산, ‘제3의 경계 공간’
엄길청의 문전성시 [전체보기]
말과 현실이 너무 다른 부산
반도체와 부산
이보성의 미술 현장 산책 [전체보기]
두 미술관, 각자의 역할을 묻다
시장이 강해진 것일까, 비엔날레가 약해진 것일까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복지의 ‘필요 원칙’과 포퓰리즘
보건의료에서 지방정부 역할과 ‘정책 의료’
이정구의 맛과 건강 [전체보기]
미식과 오래 씹기
이제명의 오션 드림 [전체보기]
광복 81년, 다음은 바다의 산업 주권
HMM 부산 이전, 해양수도의 시험대
이홍의 세상현미경 [전체보기]
국제질서의 지각변동과 한국의 성장경로
한국이 가진 자산
정쾌호의 부동산 탐구생활 [전체보기]
부산 아파트 10년, 이중 양극화와 위상 추락
미분양의 경고, 지방 맞춤 ‘출구전략’ 서둘러야
주재민의 명당을 찾아서 [전체보기]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인 정문도 묘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진 형국, 곡전재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추석의 식탁, 가족을 잇는 와인
오스트리아 와인,빈의 시간을 마시다
특별기고 [전체보기]
‘해양수도 부산’ 토대부터 바로 놓아야
당론 따를지 역사 따를지 양심의 선택을
하순봉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박자와 기보
국민악파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이대원의 ‘온정리 풍경’
유영국의 1957년 작 ‘사람’
CEO 칼럼 [전체보기]
거울 속의 외계인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
  • 국제신문 골프대회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