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인기를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가 쇄(刷)이다. 처음 인쇄한 초쇄가 모두 팔려 다시 찍으면 2쇄가 된다. 과거에는 초쇄를 5000부 이상 찍기도 했으나 책 안 읽는 요즘엔 300부 발간도 많다. 100쇄 이상 찍은 대표 작가가 조정래(83)이다. 근현대사 3부작인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은 2000년대 초까지 1200만부나 팔렸다. 많은 중장년층이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분단을 거쳐 1980년대 민주화운동까지 녹여낸 그의 대하소설을 읽고 역사를 공부했다.
작가 김훈은 ‘태백산맥’의 주제를 이념과 계급을 넘어 사랑으로 읽었다. “소화와 정하섭 대목을 쑥 빼서 읽으면 ‘춘향전’을 능가하는 사랑 이야기”라는 것이다. ‘태백산맥’만 그럴까. ‘아리랑’과 ‘한강’ 역시 역사의 굴곡에 민초의 사랑이 중첩된 얼개로 짜여있다. 세 작품에 등장하는 1200여 명의 삶은 곧 ‘사랑이야말로 곪아터진 상처를 꿰매고 인간성을 회복하는 구원의 길’이라고 웅변한다.
68편의 작품을 쓴 거장이 사랑을 본격적으로 다룬 첫 작품 ‘서리꽃’을 내놨다. 서리꽃은 추운 겨울 유리창에 폈다가 사라진다. 아름답지만 덧없다. 영원을 맹세해도 언젠가 소멸할 것 같은 사랑의 상징이 서리꽃이다.
여든을 넘긴 조정래에게 사랑은 뭘까. 그는 “사랑한다는 것은 함께 운다는 것이다”고 했다. 눈물의 무게는 데이터로 측정할 수 없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함께 아파하는 일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서리꽃’은 AI 시대에 인간성을 복원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그렇다고 ‘서리꽃’이 단순한 사랑 소설은 아니다. 천민자본주의가 빚어낸 무한한 탐욕이 어떻게 사랑을 옭아매는가가 이야기의 뼈대다. 작가는 한 발 더 나아가 돈과 권력에 파괴된 사랑을 어떻게 재창조할 수 있는가를 탐색한다. “사랑은 인간이 삶을 존속해 나가는 데 희망과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가 아무리 험악해도 사랑을 막을 수 없다”고 한다. 평생 현실의 모순과 갈등에 애달파하다가 마침내 사랑의 영원성이란 종착지에 다다른 듯하다.
조정래는 ‘서리꽃’이 마지막 장편 소설이라고 했다. “100m 달리기 식으로 투쟁하듯이 써왔기에” 이제는 몸에 자유를 허락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큰 수술로 죽음 문턱을 경험한 뒤 “인생을 쉬엄쉬엄하게 만들고” 싶은 건 당연하다. 하지만 평생 그의 작품을 읽고 함께 울었던 독자 입장에선 못내 아쉽고 안타깝다. 부디 건강하게 많은 작품을 쓰길 기도한다. 무한경쟁의 위세에 사랑이 주눅 들수록 ‘서리꽃’ 같은 소설이 더 필요하다.
이노성 미래전략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