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 사회, 특히 중년 세대 사이에서 철학이 다시 읽히고 있다. 서점가에는 철학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가장 많이 찾는 철학자가 됐다. 고도 성장 이후 삶의 의미를 다시 묻기 시작한 세대가 인생의 반환점에서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사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의 중심에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와 프리드리히 니체가 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맹목적 의지’의 존재로 봤다.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하고 그것이 충족되면 다시 권태에 빠지는 존재라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통찰이다. 니체 역시 삶을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보지 않았다. 다만 그는 그 고통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뜨겁게 껴안으라고 권한다. 그리고 그 고통마저 삶의 에너지로 전환하며 스스로의 존재를 부단히 창조하는 인간, 이른바 초인(超人)인 ‘위버멘쉬(Ubermensch)’를 제시한다.
두 철학자의 사유는 ‘욕망이 곧 고통’이라는 동양철학의 통찰과도 맞닿아 있다. 이러한 통찰은 삶의 무게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깊은 공명을 일으킨다. 이들이 고통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공통적으로 제시한 해답은 바로 ‘예술’이다. 쇼펜하우어는 예술을 통해 인간이 잠시나마 욕망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는 ‘정적’을 경험할 수 있다고 봤다. 반면 니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술을 통해 삶의 비극마저 긍정하는 ‘역동’을 이야기한다.
이들의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세 개의 오래된 라틴어 문장과 마주하게 된다. 먼저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경구다.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 삶의 유한성이 드러나고 이 인식은 역설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더욱 선명하게 바라보게 만든다. 다음은 아모르 파티, 많은 이들이 가수 김연자의 대표곡으로 먼저 떠올리지만 이 말은 사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니체의 선언이다. 주어진 고통과 실패마저 삶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라는 실존적 결단이다. 내 삶에 닥친 모든 풍랑을 나의 것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때 인간은 비로소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 마지막은 카르페 디엠, ‘현재를 붙잡으라’는 말이다. 죽음을 인식하고 운명을 긍정한 인간이 도달하는 종착지는 지금 이 찰나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다. 이때의 카르페 디엠은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존재의 모든 생명력과 창조력을 현재 속에서 분출하는 행위다.
니체는 예술을 두 가지 힘으로 설명했다. 질서와 형식을 상징하는 ‘아폴론적’ 에너지와 열정과 황홀경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적’ 에너지다. 그는 진정한 삶의 긍정은 디오니소스적 충동, 즉 삶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환희로 전환하는 힘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어린 시절 누가 시키지 않아도 노래하고 춤추며 내면의 디오니소스를 발산했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우리는 이성과 효율을 중시하는 아폴론적 질서에 길들여졌고 예술은 삶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지금 우리가 다시 철학을 찾는 이유는 무너진 삶의 균형을 회복하고 싶기 때문이다.
철학의 통찰은 개인의 삶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문화정책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이를 정책으로 실천한 인물이다. 그는 영국 예술위원회 설립을 주도하며 국가가 왜 예술을 지원해야 하는지를 보여줬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물질적 복지를 넘어 예술을 향유하고 창조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이제 우리는 케인즈가 제시한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전통적 복지 개념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요람에서 예술로, 그리고 예술 속에서 삶을 마감하는 사회’로의 전환이다. 죽음을 기억하고, 운명을 사랑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그 여정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기반이 바로 예술이기 때문이다.
삶을 머리로만 이해하려 하기보다 온몸으로 느끼고 즐기는 일, 다시 노래하고 춤추며 내면의 활력을 깨우는 일, 전시장을 거닐고 악기를 배우며 일상의 축제에 몸을 던지는 일. 그것이야말로 메멘토 모리에서 카르페 디엠으로 이어지는 삶을 예술로 완성하는 길이며 스스로의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빚어내는 현대적 의미의 위버멘쉬로 살아가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