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박경리 작가 탄생 100주년이다.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1955년 단편소설 ‘계산’으로 등단, 장편소설 ‘토지’ ‘김약국의 딸들’ 등 숱한 명작을 남긴 한국 문학사의 거장. 1996년엔 토지문화재단을 설립하고 ‘한국 현대문학의 산실’로 불린 창작실을 운영하면서 후배들에게 길을 터준, 우리 문화예술사의 넉넉한 어머니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정부는 2008년 그가 타계하자 이런 공로와 업적을 기려 문화훈장 중 최고 등급인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토지’를 시작으로 그의 작품들을 읽으며 박경리 탄생 100주년의 의미를 나름 기념해 보았다. 그가 왜 한국 문학사의 ‘뿌리’이자 생명을 품고 키워낸 기름진 ‘토지’인지 새삼 실감한 지난 넉 달이었다.
박경리의 작품은 주로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개인·가족·민족이 겪는 비극, 동시에 이를 강인한 의지로 극복하는 사람에 주목한다. 특히 초기작인 ‘표류도’나 ‘시장과 전장’ 등은 전쟁 때 남편을 잃고 홀로 아이를 키우며 역경을 견딘 작가의 자전소설 성격이 강하다. 박경리 작품의 정수이자 한국 대하소설의 금자탑으로 꼽히는 ‘토지’는 조선말부터 광복까지 최참판댁 일가를 중심으로 시대를 써 내려간다. 1897년 풍성한 한가위 명절을 시작으로 1945년 해방 소식에 만세를 부르는 것으로 끝나는데, 완독 순간 독자는 격동의 세월을 직접 버텨낸 느낌을 받을 정도로 살아 펄떡인다.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집필기간만 무려 25년, 권당 500페이지 안팎이 총 20권, 원고지 2만9500장이라는 방대한 서사 속에서, 작가는 600여 명의 등장인물을 통해 고난을 거쳐 끝내 삶의 영광을 찾는 그 시대 평범한 사람들을 모두 ‘주인공’으로 빛낸다.
소설의 주요 배경으로 부산과 경남이 자주 등장하다 보니 지역사를 되짚을 수 있는 점은 박경리 읽기의 또 다른 묘미다. ‘토지’에서 송관수가 관여한 형평사운동은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백정 인권운동이다. ‘저울대처럼 공평하게(형평)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지향하며 계급, 나아가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하지만 일제는 물론 신분·계급의식에 찌든 대중의 ‘이중 억압’ 속에서 좌절한다. 그의 아들 영광은 이런 시대적 한계를 상징한다.
작품 속 당대 지식인 간의 격렬한 논쟁은 ‘시대 기록자’로서 문학의 역할을 보여준다. ‘아래로부터의 민중혁명’ 동학은 항일투쟁으로 이어지며 가치를 높이 평가받지만 친일로 변절하는 등 일부 일탈세력으로 인한 이면도 있음을 상기한다. 일제가 사회주의 확산 방지의 방패막이로 민족자본가를 이용하고자 물산장려운동 같은 민족자본운동을 방조했다는 시각도 조명한다. 이렇듯 박경리는 역사를 단편적 시각에 가두지 않는다. 등장인물 이름이 소설 간에 반복 사용되는 점은 꽤 흥미로운 장치다. ‘표류도’의 신문사 논설위원 이상현은 ‘토지’의 나약한 지식인 이상현으로, ‘파시’ 속 아들의 사랑을 반대하는 박 의사는 ‘토지’에서 최서희 일가의 주치의인 박 의사로 이어진다. 이런 묘하게 닮은 상호텍스트성은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구현해 가는 작품의 빌드업 과정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왜 작가는 피 흘려가며 슬픈 이야기를 써야 하는가. 왜 전쟁의 비극은 시처럼 아름다운가’(‘시장과 전장’ 초판 서문). 비극이 아름다운 건, 그것을 질긴 생명력으로 이겨내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메시지는 박경리 전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다. ‘토지’의 최서희는 악귀 같은 먼 친척 조준구에게 하동 평사리 만석꾼 땅을 모두 빼앗기고 만주로 쫓겨가지만 다시 일어서 모조리 거둬들이며 복수에 성공한다. ‘김약국의 딸들’에서 둘째 딸 김용빈은 본인과 가족의 끔찍한 비운을 겪고도 새 삶의 의지를 불태우며, ‘시장과 전장’의 지영 역시 피란 내려온 부산이라는 모든 것이 소모되는 ‘시장(市場)’과 ‘전장(戰場)’에서 내일을 기다린다.
박경리 탄생 100주년을 맞아 문화·출판계도 분주하다. ‘토지’는 천경자 화백의 회화가 표지에 실린 특별에디션이 발간됐고, ‘애가’ 등 다른 장편소설도 특별판으로 속속 출간돼 일독을 권한다. 이희건 한일교류재단은 ‘토지’ 일본어 완역팀을 지난 6월 시상했다. 고향 통영에선 문학축전이 지난 5월 시작해 오는 10월까지 계속되며, 박경리기념관도 리모델링을 거쳐 지난 4월 재개관했다. 박경리는 ‘남성 중심 문단에서 여성의 삶을 끈질기게 써내려 간 작가’로 흔히 수식되지만 젠더에 국한되지 않았다. 개인과 가족, 또는 민족의 결합된 힘으로 구원과 회복을 이루어내는 인간성 본연에 집중한다. 시대·국경을 초월하는 이런 보편성이야 말로 지금 박경리를 읽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있다. 영상·미디어 대세 속 텍스트힙 ‘역주행’이 의아해진 시대라지만, 그의 소설은 영상보다 더한 흡입력을 자랑한다. 한 인기 영화배우의 말을 일부 빌리자면 ‘넷플릭스 왜 보나, 박경리 소설이 있는데’다.
이선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