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났다는 이유로, 혹은 약하다는 이유로 무리에서 배제된 짐승의 사연을 듣거나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요즘은 이러한 사연이 쇼츠로 만들어져 시각적으로,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짐승의 세계가 때로는 인간의 반면교사가 될 수 있어 다시금 그 영상을 찬찬히 들여다봐도 영 꺼림칙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짐승의 세계를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라는 말로 집약한다. 또한 이를 ‘생존본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인간의 진화도 생존본능을 통해 발전해왔다. 홀로 살아가던 고인류가 생존하기 위해 무리를 이뤘지만 짐승과 마찬가지로 상처나 약함 때문에 무리에서 배제된 고인류는 살아남지 못했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사회를 형성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아주 희귀한 자료인 프랑스 동굴 유적 샤펠오생(Chappelle aux saints)에는 매우 드물게 고인류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초월한 흔적이 보인다. 약 오만 년 전의 한 유골이 동굴에서 발견됐는데 60세 전후의 노인으로 치아가 빠지고 또 고관절마저 손상된 흔적이 보인다. 당시 평균 수명이 30세 전후임을 고려하면 고인류의 어떤 사회적 집단은 상처나 약함을 지닌 한 노인을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규율로 배제하지 않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돌봄’과 ‘치료’를 실행했던 것이다.(김상태 ‘단단한 고고한’)
우리는 진정한 인간의 진화가 이런 돌봄과 치료를 통해 발전해왔다는 흔적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고인류는 30세 전후의 짧은 생을 살아갔지만 고인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주검을 치장하고, 묻고, 기리는 인간성을 내비쳤다. 이로써 인간은 짐승과 다른 문화와 의식을 지니게 된다.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생존본능이 자연에 비해 훨씬 나약한 인간이 그런 조건을 넘어서기 위한 진화의 과정이라고 표현하지만, 인간의 내면에 있는 돌봄과 치료라는 생존본능은 만물의 창조주가 인간에게만 허락하신 ‘마음’이다. 인간의 이 마음은 생존의 문제를 넘어 ‘존재’의 문제로 확장되며, 이를 중심으로 인간은 진화한다. 사실 의학의 발전은 사랑하는 이를 병으로 잃고 난 후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거나 질병의 고통을 겪는 인간이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집요하게 연구한 결과이며, 경제 발전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물질적인 생존을 위해 구축한 인간 몸부림의 결과이다. 모든 발전에는 이런 ‘마음’이 있다.
오늘날 인류애는 위기에 빠진 듯하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물론, 우리 주위에서 여전히 일어나는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으로 인해 인간이 인류애의 결과로 얻은 문명을 다시 짐승의 세계로 되돌리는 듯하다. 인간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질서와 윤리가 필요하지만 그 질서와 윤리가 프랑스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 오만 년 전의 돌봄과 치료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한 반드시 짐승의 세계로 되돌아가게 돼있다.
선종하신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사회를 “마음에 반(反)하는 사회”라며 현대사회의 정곡을 찔렀고, 그의 후임자인 현 교황 레오 14세도 자신의 첫 회칙 ‘고귀한 인류’에서 인류애가 퇴보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곧 정치나 경제, 심지어 종교는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생존본능을 위해 필요한 길이 아니라, ‘마음’이 드러나는 ‘인류애’를 실현할 도구여야 한다.
고귀한 인류애를 실천하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이 고민해야 할 것이 많다. 곧 자신만을 위한 욕망에서 벗어나야 하며, 반대로 다른 이에 대한 관심으로 자신을 소진하지도 않아야 한다. 인류애의 실현을 위해 진보와 퇴보를 겪는 과정은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견고하게 할 것이며, 더 나아가 신은 인간의 운명을 왜 이리 복잡하게 설정했나에 대한 대답(神學)도 될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과정을 단순화하고 싶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다른 이를 모른 체하고 짐승의 세계에서 여전히 견고하게 지켜지는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생존본능만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인간의 삶일까? 생존한다고 다 살아있는 것일까? 한 동굴에서 발견한 오만 년 전의 유골 사진 한 장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지금은 생존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