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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칼럼] 산부인과 의사와 무정자증

이상찬 세화병원 병원장

  • 이상찬 세화병원 병원장
  •  |   입력 : 2026-08-09 18:32:34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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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풍경. 버스에서 내린 예비군복 차림의 젊은 남성들이 남천동 가족협회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아들 딸 구별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사회적 분위기가 강했다. 예비군 훈련 중 정관수술을 받으면 훈련을 면제해주는 제도도 있었다.

어느 날 한 젊은 남성이 정관수술을 받으러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얼굴을 보니 왠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 물었다. “혹시 결혼하셨습니까?”

그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관을 묶어도 나중에 다시 풀면 임신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수술을 신청했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가족협회에서의 정관수술이 훗날 나의 의사 인생을 난임 치료와 정자의 세계로 이끌게 될 줄….

1981년 2월 산부인과 전문의 시험을 마치고 6월 대학병원 전임강사로 발령받기까지 공백이 있었다. 주임교수님의 권유로 남천동 가족협회에서 3개월간 근무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정관수술을 하면서 남자의 정자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1980년대 말까지도 정자가 없는 무정자증 환자가 아이를 갖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의학은 끊임없이 발전했다. 1990년대 초에는 현미경을 이용해 여성의 난자 안에 정자 한 마리를 직접 넣어 수정시키는 미세수정술(ICSI)이 개발되었다. 정액검사 결과 정자가 한마리도 없는 무정자증 남성도 고환 조직에서 수정 가능한 정자를 찾아내면 임신을 시도할 길이 열린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참 아이러니한 의사의 길을 걸어왔다. 젊은 시절에는 국가의 산아제한 정책에 따라 여성의 난관을 묶고 남성의 정관을 묶는 산아제한수술을 했다. 그런 내가 훗날 대학병원 교수직을 내려놓고 난임 전문병원을 설립해 임신을 기다리는 부부들을 돕게 되었다. 젊은 시절의 ‘원죄’를 조금이나마 씻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무정자증 환자가 찾아오면 비뇨기과 교수님을 초빙해 미세 고환조직수술(M-TESE)을 시행했다. 수술은 대개 오후 7시에 시작했다. 수술 결과 정자가 발견되면 짜장면과 탕수육을 주문해 함께 늦은 저녁을 먹었다. 반대로 정자가 나오지 않으면 무거운 마음으로 짜장면 한 그릇만 시켜 먹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시절의 짜장면 한 그릇에는 의사와 환자가 함께 느꼈던 기쁨과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그 과정을 통해 나는 비뇨기과 교수님에게 미세 고환조직 수술을 배웠고, 산부인과 의사인 내가 무정자증 남성의 고환에서 정자를 직접 찾아내는 수술까지 하게 되었다.

사람의 운명은 참 알 수 없다. 전문의 시험을 마친 뒤 우연히 가족협회에서 정관수술을 하게 된 일이 결국, 난임을 평생의 진료 분야로 삼게 된 출발점이 되었다. 개원 초기에는 산과, 부인과, 소아과를 모두 진료했지만 여러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하나씩 내려놓고 난임 진료에 집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우연이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그 우연은 필연이 되어 있었다. 나는 사람의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만나는 운’이라고 생각한다. 운이란 단순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도와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나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 좋은 뜻을 가진 사람과 함께할 때 우리는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있다. 그 운은 억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고 어려운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어느 순간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이 모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돌이켜보면 나의 인생도 그랬다. 정관수술로 시작된 한 번의 우연한 만남이 정자와 난자의 세계로 나를 이끌었고, 난임 부부의 소중한 꿈을 함께하는 의사의 길로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믿는다. 사람은 능력도 중요하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는 운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운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어느 날 조용히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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